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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통을 모으러 다니는 나그네”【44신】
대승보살의 실천적 삶 살다 간 법장 스님
법장 스님.
“사람들이 원장스님 원장스님 하지만 난 그저 고통을 모으러 다니는 나그네일 뿐이지요.”

총무원장 소임을 맡은 지 6개월쯤 지난 2003년 여름, 법장 스님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법장 스님의 45년 수행자 생활은 스님 스스로가 원했듯이 대중과 함께 한 삶이었다. 사람을 좋아했던 성품 그대로 누구에게나 따뜻함을 잃지 않는 인자한 수행자였던 법장 스님. 법장 스님은 선 수행자로서, 종단의 최고 행정 전문가로서 선풍을 진작시키고 불교의 사회화ㆍ대중화ㆍ현대화를 이루기 위해 오롯이 대승보살의 실천적 삶을 살아 온 이 시대의 ‘원력보살’이었다.

법장 스님은 출가 뒤 덕숭산의 정혜사 능인선원과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용맹정진을 하며 5안거 동안 화두정진을 했다. 선의 본산인 수덕사 주지를 맡고 나서도 법장 스님의 수행정진은 계속됐다. 매일같이 정진을 거르지 않으며, 새벽예불은 반드시 올리고, 도량청소에 빠지지 않으며, 대중들과 함께 공양하고, 사하촌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다섯 가지 계율을 스스로 정하고 이를 지켰다.

평소 법장 스님은 ‘신심ㆍ원력ㆍ무사심(無私心)’을 수행자가 지녀야 할 기본자세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후학들에게는 늘 “신심이 없으면 속인과 다를 바가 없으니,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수행에 정진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지켜 나가면서 한국 근대 선의 중흥조인 경허ㆍ만공ㆍ용성 대선사의 선풍을 진작시키는데도 앞장섰다. 1992년에는 ‘한국불교선학연구원’을 설립해 선 보급에 나섰으며, 선지종찰인 수덕사의 본래 모습을 되찾겠다는 계획 아래 수덕사 종합 중창불사를 벌였다.

총무원장이 돼서도 선 중흥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 선을 알리고, 외국인을 위한 참선 수행관을 짓겠다는 발원으로 여러 가지 계획을 추진했으며, 각종 선법회에 참석하는 등 선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법장 스님은 수덕사 주지 시절부터 자타가 인정하는 종단의 최고 행정 전문가로도 꼽혔다. 1981년 조계종 중앙종회 사무처장을 시작으로 종무행정에 발을 들여놓은 법장 스님은 조계종 사회부장, 재무부장 등을 거치면서 실무능력을 쌓았다. 또 수덕사 주지로 있으면서 정부 및 자치단체 행정에 대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져진 이론과 실무능력은 총무원장으로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대 정부 행정을 펼치면서 빛을 발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법장 스님의 진면목은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 법장 스님이 평생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수덕사 주지시절 불우한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 것이나, 교도소 재소자 교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나, 생명나눔실천회를 설립하고 생명살리기 운동에 나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사람을 소중히 여겼던 스님의 철학은 자연스럽게 인재양성으로 이어졌다. 수덕사 주지 당시 20년을 넘게 전국 선방의 대중공양을 해 온 스님은 총무원장이 돼서도 이를 거르지 않았다. 또 역대 총무원장 중 승가교육에 대해 가장 깊은 관심을 쏟으면서 승가교육체계 확립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청소년 대학생 등 인재를 키우는데 전력을 다했다. 법장 스님은“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법장 스님은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과 격의 없이 만나길 좋아했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은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거의 없었다. 2년6개월의 총무원장 재임기간 중에 사람들을 만난 횟수는 역대 총무원장 중 최고다. 숨 돌릴 틈 없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법장 스님은 신도단체 대표나 신행단체 불자들 대부분을 만났다. 수덕사 주지 시절엔 한 달에 1만Km를 다녔을 정도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았던 것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체면과 격식을 차리지 않는 성품이었지만 어른을 공경하는데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깍듯했다. 누구보다 ‘승려노후복지’를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성품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모든 것을 항상 열어 놓고 있어야 한다’는 소신은 총무원장이 돼서도 변함이 없었다. 총무원 출입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감 없이 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법장 스님은 언제나 마음을 열어놓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자상한 성격 때문에 때로는 “총무원장 격에 맞지 않게 작은 일에도 나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법장 스님은 “모두가 부처님 일인데 크고 작고가 어디에 있겠느냐”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소탈하고 꾸밈없는 성격 역시 이따금씩 ‘종단 정치’에서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능란한 정치보다는 원칙과 대화로 풀어나가려는 법장 스님의 스타일은 때로는 ‘종단 정치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법장 스님은 늘 “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수행자”라며 여유를 잃지 않았다.

‘눈길을 가는 나그네여, 조심해서 발을 디뎌라. 오늘 네가 가는 그 행적이 뒷사람이 따르는 이정표가 되리니’.

법장 스님이 가장 즐겨 읽던 서산대사의 시구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던 자유자재한 수행자였던 춘성 스님과, 평생 일꾼들과 똑같이 일했으면서도 뛰어난 수행력을 보였던 노스님(은사 원담 스님의 은사)을 사표로 삼았던 법장 스님은 후학들의 이정표가 되기 위해 수행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출가한 사촌형에게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당당하고 여유로운 수행자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던 법장 스님. 시자 진광 스님의 노트 뒷장에 남겨진 법장 스님의 친필 내용은 바로 그 옛날 사촌형에게서 보았던 당당하고 여유로운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다간 스님의 일생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한명우 기자 |
2005-09-13 오전 12: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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