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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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버리면 세상은 온통 연등
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대학생 흥국사서 템플스테이
과연 사람들은 언제쯤 분쟁을 멈추고 평화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대단한 결단이나 행동보다는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소한 일이 인류 평화의 시작일 것이다.

"미움을 버리고 마음속 등불을 밝히겠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학생들이 연등을 들고 평화를 기원하며 함께 탑돌이를 했다.
그런 만남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그들은 지난 2천년 동안 서로를 죽여 땅과 재산을 빼앗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은 예루살렘을 동서로 갈라놓은 장벽처럼 마음 속 장벽 또한 너무 높다.

평화와 상생의 길을 찾는다는 거창한 명제의 실천에 앞서, 우선 만나서 서로를 알아보자는 목적으로 이-팔 대학생 20명이 8월 26일~9월 6일 한국을 찾았다. 세계평화축전에 참가한 그들이 9월 3~4일 고양 흥국사(주지 대오)에서 한국불교를 체험했다.



# 우리가 이렇게 만나다니…

9월 3일 오후 흥국사(주지 대오). 외국인 대학생 20여 명이 범종각 옆을 지나 사찰 안으로 들어온다.
발우를 정리하는 참가자.
자유분방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선글라스를 낀 눈으로 사찰 단청이며 탱화를 흥미롭게 관찰하는 모습은 흥국사가 매주 개설하는 주말템플스테이를 통해 한국불교를 체험하려는 보통 외국관광객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몹시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열흘 전만 해도 이들 사이에는 서로 눈길을 주거나 말을 건네는 게 어색할 정도로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바로 지금도 서로를 죽고 죽이고 있는 ‘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 땅에서 건너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학생이기 때문이다.

노아 엡스타인 씨(이슬라엘 대학생)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팔레스타인인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며 “한국에 오기 전까지 서로 만나 이야기한다는 것은 꿈꾸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대학생들은 제3국에서라도 이스라엘인을 만나는 일을 고통 받는 민족에 대한 배반행위가 될 수 있다는 ‘무거운 부채의식’을 가지고 한국을 찾아왔다 한다. “이스라엘의 압제를 받고 있는 본국에 이런 사실이 알려질 경우 지하드 조직의 테러를 받을 수 있다”는 마이클 씨(팔레스타인 대학생)의 말을 듣는 순간 이-팔 분쟁의 심각성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팔 대학생들이 서로의 발우에 음식을 떠주고 있다.



# "발우공양에 무슨 평등ㆍ청결함이 있지?

3일 저녁 흥국사 설법전. 이-팔 대학생 20여 명이 수련회복을 갈아입고 전통 발우공양을 체험하기 위해 네줄로 나란히 앉아있다. 5분이 지났을까, 발우를 풀어놓지도 못했는데 ‘밥 먹는 것이 고문’이란 표정이 하나 둘 늘어난다.

차담을 나누며 한국불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청수물과 밥 국 찬을 돌리는 진지, 오관게 암송, 공양, 숭늉받기, 찬상내기까지 무려 한시간 반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각경 스님이 “발우를 씻은 물에 이물질이 있으면 안 됩니다. 다 함께 마시세요”라는 말에 학생들은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발우공양 체험에 대해 살램 양(팔레스타인 대학생)은 “아랍사람에게 식사는 가장 편안하게 하는 것인데 군대식사도 아니고 너무 지켜야 하는 게 많다”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녀는 “발우공양에 무슨 평등정신과 청결함이 담겨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다비드 씨(이스라엘 대학생)는 “2천년을 끌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다툼도 상대방을 겉만 보고 판단했기에 벌어진 측면이 적지 않다”며 “점심 식사를 한 후 수없이 음식 쓰레기를 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니, 내가 필요한 만큼 가져다가 깨끗하게 다 먹는 발우공양에 합리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 총 대신 희망의 연등 들고

3일 저녁 9시. 이-팔 대학생들은 연등제작을 마치고 약사전 앞 석탑 앞에 서있다. 연등을 켜고 탑을 돌며 이-팔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시간. 각경 스님이 “이 순간 미워했던 마음을 잊어버리고 서로를 위해 불을 밝히자”는 제안에 따라 20여 명 이-팔 학생들이 석탑을 돈다. 총 대신 희망의 연등을 든 것이다.

연등제작을 체험하는 이-팔 대학생들.
산사의 저녁은 너무나 고요하고 연등을 든 사람들 사이에는 나와 네가 없다. 우리와 상대편이 없다. 환한 불빛을 바라보며 평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눈치다. ‘미워하는 마음을 쉬면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했는가?’

요아프 씨(이스라엘 대학생)는 “팔레스타인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해 보니 공통점이 생각보다 많았다. 상대 입장을 생각한다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친구”라며 중동의 평화를 기원했다.

마이클 씨(팔레스타인 대학생)는 “연등을 들고 탑을 돌며 오랜 세월을 싸운 이유를 찾아 봤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짧은 시간이지만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한국사회에서 처음 평화란 것을 맛 봤다”고 말한다.

9월 4일 오전. 울력을 마친 사기 씨(이스라엘 대학생)가 약사전 불상 앞에 합장을 하고 섰다.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부처님께 오체투지를 한다. 유일신을 믿는 이스라엘인이 ‘타종교의 우상’ 앞에 절한다는 것이 너무나 의외였다.

사기 씨에게 무슨 이유로 오체투지를 했는지 물었다. “내면의 평화와 타인에 대한 사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본질은 모두 같다고 생각한다. 오체투지를 하든, 성경을 들든, 코란을 읽든 종교인의 길은 모두 같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서 같은 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절을 했다.” 합장하는 사기 씨의 얼굴에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4개국 대학생 초청 평화토론회 개최하는 텔 아비브 대학 보아즈 부총학생회장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서 우리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팔 사람들은 아랍세계의 이웃이지만, 이해하기보다 미워하기에 바빴던 것 같습니다.
텔아비브 대학 보아즈 총학생회부회장.
이제 함께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경기도가 주최한 세계평화축전의 일환으로 8월 26~9월 5일 열린 코파이스(KOPAIS: 한국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약자) 평화친구 행사에 참가한 텔아비브대학 보아즈 트포르프스키 총학생회 부회장의 소감이다.

보아즈 부회장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처음에는 서먹서먹했던 팔레스타인 학생들을 친구로 사귀게 됐다”며 “오늘의 소중한 경험을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계기로 삼기 위해 내년 8월 텔아비브대학에서 한국 북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학생들을 초청한 평화토론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결정은 이-팔 대학생들이 9월 1일 남북 분단의 상징인 도라산 역에서 중동분쟁의 해결방법을 놓고 진행된 토론에서 나온 것이다.

보아즈 부회장은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당사자들이 만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한국 전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남북한도 자꾸 만나다 보면 이해의 폭이 커지고 그러다보면 평화통일의 길도 열릴 것”이라고 조언했다.
글=강유신ㆍ사진=박재완 기자 |
2005-09-10 오전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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