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비
문태준 시인의 '묵언(默言)' 전문
‘불교’가 시(詩)로 나투었다. 존재의 이유, 삶의 실재를 성찰해온 시인들이 그 해결방법으로 불교적 사유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 발표되는 현대시들을 살펴보면 불교적인 성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시인의 종교는 상관없다. 불교적인 세계관이 시어로 천착될 뿐이다. 그럼 왜 불교가 이 시대 시단(詩壇)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를까. 또 누가 어떤 시어로 불교를 시화(詩化) 시키는 것일까.
□ 불자시인들은
우선 스님 시인으로는 오현 정휴 청화 덕진 성우 진관 효림 밀행 만다 로담 혜인 정운 지원 원철 묵연 스님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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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꼭 불자 시인들만이 시 안에서 ‘불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2006 소월문학상 특별대상 수상자인 유안진 교수(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는 ‘불상(佛像)에 갇힌 세월 천년 넘어 더 넘어, 무존재로 존재할 수 없어 탄식하던 나를 가둬놓고 너희는 득도해탈하여 자유로웠는지 몰라도, 갇힌 나는 갇힌 득도 해탈은 이목구비 가까스로 놓아보낸 몸뚱아리 뿐, 나의 참 해탈은 모습 없이 존재하는 것(갇힌 자의 자유, 울음 中에서)”이라며 진정한 해탈의 모습을 영롱한 시어로 얽어냈다.
정호승 시인 역시 최근 발표한 시선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에서 간결하고 정제된 불교적 시어로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정호승 시인은 ‘눈부처’ ‘선암사’ ‘가시’ ‘강물을 따라가며 울다’ 등에서 불교의 정서, 해탈의 심상을 시로 승화시켰다.
이외에도 필생의 업(業)인 ‘시’를 ‘내 발자국에 음각되는 불립문자’라고 말하는 임영조 시인, ‘화두의 생산자’라 불리는 정진규 시인, ‘동백을 운주사 와불처럼 부처의 현신으로 표현한’ 송찬호 시인, ‘실재와 환상의 경계를 성찰하며 불교로 경도된’ 이성복 시인 등이 불교에의 이끌림을 시로 읊조리고 있다.
□ 그들의 작품세계
최근 활발한 시작을 펼쳐보이는 시인은 지난 8월 다섯 번째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를 낸 장석남 시인과 동서문학상 소월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문태준 시인이다.
장석남 시인의 시집 <미소는,…>은 나온지 한 달도 안돼 교보문고 시 부문 베스트셀러 5위, 영풍문고 9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본인이 스스로 인식하기 이전에 오거나 가거나 미소가 가듯이, 의식하기 이전의 가고 오는 그런 것들을 이번 시집에서 담고 싶었다”는 장 시인은 “제목부터 불교적이고 선문답을 많이 즐겨서 시가 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맨발> 등 두 권의 시집을 낸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은 최근 미당문학상 후보에 오르면서 주가를 더욱 높이고 있다. 특히 그의 시 ‘가재미’는 지난해 시인 평론가 120명이 뽑은 ‘2004 가장 좋은 시’로 선정되는 등 평단과 독자의 호응이 대단하다. 또한 문씨는 대학가에서 가장 많이 러브콜을 받는 인기 시인 중의 한명이기도 하다.
“<경허집> <한암집> 등 큰스님들의 어록에서 감화 받은 부분이 많아 불교적 시상이 시 속에 많이 녹아 있는 것 같다”는 문 시인은 “요즘 불교적인 사유 조각들을 더 많이 시어로 꿰고 있다”고 근황을 귀띔한다.
□ 신춘문예도 ‘불교’ 열풍
최근 각종 수상작들을 살펴봐도 불교색이 강하다. 2006 제20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자 박주택 교수(경희대 국문과)는 ‘한 올 연기는/전생을 감아올리다’(독신자들 中에서)라고 뿌연 연기 묘사를 통해 윤회를 그리고 있다.
우수상 수상자 조용미씨도 지율 스님을 시제(詩題)로 삼아 ‘도롱뇽 수를 놓다’를 썼는가 하면 그의 시 ‘바람의 행로’에서는 ‘삶의 미망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반드시 팔만의 장경과 일천칠백의 선의 공안이/필요한 것은 아니’라며 선불교 사상인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현하기도 했다.
2005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김승해씨는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거조암 가는 길’ 등에서 풍경 운판 목어 등 불교적인 키워드를 선택해 현대 사회의 군상들을 풀어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은 2년 연속 불교 소재의 시조가 뽑히기도 했다. 장창영씨가 ‘잘생긴 배롱나무’로 2005년에, 이교상씨는 ‘하늘꽃 내리는 소리’ 로 2004년 수상자가 됐다.
왜 지 금 ‘불 교’ 시 인 가
“禪이 주는 명상·사색의 필요성 절실”
“삼매·몰입의 경지 수행 생활과 공통”
현대는 과학ㆍ물질ㆍ자본 만능시대이다. 현대인들은 갈수록 기계화 물질화 자동화의 물결 속에 깊은 내면의 성찰과 자유로움을 잃고 있다. 여기에 대처하는 대안의 하나로 불교적 명상의 소중함과 정신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상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시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평론가 김재홍 교수(경희대, 만해학술원장)는 “현대시의 중요한 시적 경향이 상당부분 불교적 성향 또는 선시적 경향으로 선회하거나 그런 지향성을 뚜렷이 나타내는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선이 주는 명상과 종교적인 사색의 필요성이 어느 시대보다 절실한 만큼 명상과 사색을 통한 정신적 구원에 목말라 있다”고 불교시가 범람하는 현상적 이유를 설명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염무웅 교수(영남대)는 불교가 시에 녹아드는 이유를 시인들이 시를 통해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깨달음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에서 찾는다.
“시를 쓰는 목적이 내면의 진실 추구인데 제대로 된 시를 쓰려다 보면 불교적 깨달음의 길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 간다”는 염 교수는 “삼매와 몰입의 경지 속으로 빠져드는 수행 생활과 시작을 펼치는 일은 공통점이 많다”며 이런 점에서 시인과 불교는 불가분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삶을 풀어내는 비밀이 불교에 있기 때문에 시인들이 불교적인 사유를 하는 것”이라는 장석남 시인은 “믿고 믿지 않고를 떠나서 현대사회가 찾는 탈출구가 과학적인 불교로 귀착되고 있다”고 인기 원인을 분석한다.
불교적 사상이 시 정신의 대안으로 선택되고 있다고 지적한 문태준 시인도 “불교적 사유를 잉태한 시들은 우주의 근원적 존재에 대해서도 보다 깊고 넓게 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문시인은 “부처님 법은 사부대중들의 실질적인 고민으로 꽉 차 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질문하고 구체적으로 답해주기 때문에 시 언어의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충분한 역할을 한다”고 불교시 열풍 이유를 제시한다.
불교천착 시인계보
초창기 최남선 등이 현대시에 접목
80년대 이후 선적 취향 드러내
김재홍 교수의 <한국현대시의 사적탐구>에 의하면 현대시의 불교색 계보는 신문학 초창기 최남선 이광수에서 비롯된다.
최남선은 <백팔번뇌>라는 시조집을 통해 불교적인 개념을 현대시에 끌어들였다고 평가받는다. 이후 홍사용 오상순 박종화 등이 불교적 세계관과 색채를 진하게 드러냈다. 1920년대 최대의 불교시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만해 한용운이다.
이어 1930년대는 개성시대다. 불교적인 세계관과 감수성을 한국적인 한의 미학으로 합일시킨 서정주, 대승적인 불교사상을 사회 역사적으로 확대해 실천불교의 실마리를 제공한 조지훈 등이 활동했다.
1950년대로 들어서면 조병화 이원섭 이설주 김관식 이형기 천상병 장호 박희진 박재삼 고은 등이 불교적인 세계관과 선적인 감수성을 시어로 표현했다.
1960~70년대에는 정진규 허영자 임보 박제천 김초혜 홍희표 박정만 홍신선 문정희 오세영 임영조 유자효 국효문 등이 활동했다.
이 시기에 주목할 부분은 토속적 정한의 세계 또는 순수서정의 세계를 추구해온 유수한 시인들이 불교적 성취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1980년대 불교 시문학의 중요한 성과는 고은의 <만인보>와 김지하의 연작시집 <애린>으로 귀결된다.
이와함께 오랫동안 민족문학 계열의 시를 썼던 조태일 이시영 박노해 등이 불교적인 감수성, 선적 초월과 명상의 세계를 선보였다.
1990년대에는 중진시인 황동규, 정현종, 조정권, 최승호, 최동호, 황지우 등이 선적 취향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