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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잔치 29년째 사랑의 떡방앗간 여사장
아름다운 삶, 사람 - 김옥순 서부패밀리 떡방앗간 사장


떡 배달하는 김옥순 보살. 사진=박재완 기자.
어디선가 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다. 빨간 헬멧을 쓰고 바람같이 나타난 사람은 울산시 동구의 또순이 아줌마로 불리는 김옥순(58) 씨다. 울산시 동구 서부패밀리 아파트 상가에 있는 서부패밀리 떡방앗간의 사장인 김 씨는 오후 나절 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새벽 5시에 출근해 오전만 떡 방앗간에서 일하고는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졌다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내가 가는 곳이요? 내가 좀 볼 일이 많아요. 그래서 오토바이 운전 경력만도 벌써 30년입니다. 오토바이 없으면 볼 일을 다 못 볼 정도로 바빠요.”

떡 방앗간 사장이 떡 만드는 일도 아닌 일로 뭐가 그리 바쁠까? 오토바이를 따라 가보면 금방 그 답을 알 수 있다. 김 씨의 오후 시간은 어김없이 울산시 동구에 소재한 경로당 48곳을 하루에 2-3곳씩 나눠 둘러보고 그 곳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는 일로 채워지고 있다.

김옥순 보살. 사진=박재완 기자.
벌써 29년째 하고 있는 일이다. 1977년 통장을 처음 맡았을 때,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경로당 어르신에게 점심 한 끼 대접해 드린 것이 인연이 되었다. 따뜻한 밥 한 끼에 어르신들의 얼굴에서 피어나던 웃음을 잊지 못한 김 씨는 매년 경로당 어르신을 초청, 잔치를 열었고 효도 관광도 시작했다.
가진 것 없이 객지에 정착한 김 씨의 전 재산은 맨 몸뚱이뿐. 경로잔치에 필요한 경비 마련을 위해 연탄 장사, 밤 깎기 등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다. 연탄 얼룩이 묻은 옷을 입고 때론 밤물로 불긋불긋 얼룩진 옷을 입고 다니던 김 씨가 어렵게 번 돈으로 경로잔치를 열었을 때,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한두 번 하다 말겠지’하는 냉소가 전부였다.

“그때는 정말이지 거지처럼 하고 다녔으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지요. 악착같이 벌어서 일년 동안 모았다가 하루 잔치하는데 다 썼으니 비웃었지요. 그 때 억울한 얘기 들은 것, 무시당한 것 얘기 다하려면 책 한권으로도 모자라요. 하하하.”

처음 3년간은 가족들의 반대도 심했다. 없는 형편에 자식들 키우기도 힘든데 남을 돕는 건 가당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행복한 웃음은 김 씨를 놓아주지 않았다. 3년이 지나자 남편 김재우(59) 씨까지 돕겠다고 나섰다. 2박 3일, 혹은 4박 5일의 효도관광을 떠날 때면 직장에 휴가를 내고 따라 나섰다. 온 가족이 힘을 모아 동네 어르신들을 내 부모처럼 모시기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도 김 씨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봉사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석류장과 아산재단상을 받았지만 상금 2천만 원을 고스란히 어려운 이웃의 치료비와 장학금으로 다시 내놓자 오해는 말끔히 벗겨졌다. 봉사 활동 20주년을 맞아 기념품을 돌렸을 때는 김 씨를 찾아와 김 씨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복했다며 손을 잡고 우는 사람들이 생겼을 정도.

올해 29년째를 맞이한 김 씨가 연 경로잔치는 40회를 넘었다. 처음 200-300명이던 경로잔치 인원이 이제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전국의 명승지는 안 가본 곳 없이 다녀온 효도 관광도 봄, 가을 두 번은 빼놓지 않았다. 효도 관광을 떠나는 날은 자식들 따라 객지에 와서 외롭고 쓸쓸한 일상을 보내던 어르신들에겐 특별한 외출이었다. 어떤 할머니는 여행의 기쁨에 졸도를 하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는 할머니를 지켜보며 김 씨는 울음을 삼켰다고 한다.

“제 업이라고 느껴요. 이제 조그마한 일만 생겨도 경로당에서 전화가 와요. 그러면 안 가볼 수가 있나요? 오토바이 타고 달려가야죠.” 어제 밤에도 밤 9시에 떡방앗간 문을 닫고 경로당으로 달려가 1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옆에 있던 아들이 한마디 거든다.

“해결사죠. 경로당 어르신들끼리 싸움이 나도 어머니를 찾아요.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어머니 말은 들으니까요.”
어르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숙업이 돼 버린 김씨와 어르신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깊어갔다.

김 씨에겐 경로당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 만큼이나 변함없는 세월동안 이어오는 일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아들을 위한 기도로 시작됐던 사찰 법회에 공양물 올리기다. 태어나자마자 심한 병치레로 목숨이 위태롭던 아들을 위해 무작정 찾은 곳이 집 근처의 공덕사. 백일 사진조차 찍어놓을 엄두를 못 낼 정도 였던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 이제 떡 방앗간을 함께 운영하고 있으니 그 모든 게 부처님의 은덕임을 믿고 있다. 그 인연으로 시작된 공덕사엔 오늘까지도 모든 법회 때마다 떡 공양을 올리고 있으며 방생법회가 열리면 그 법회에 필요한 공양물은 반드시 김 씨 몫이다. 그 뿐 아니다. 통도사, 불국사 등의 선방에도 하안거 동안거 때마다 대중공양을 올리기도 했다.

“전 법명도 없어요. 이름이 없어도 주고 싶으면 주고 내 마음이 부처를 만들고 내 마음이 다 알아서 한다고 믿어요. 내 마음이 깨끗해야지 내가 할 짓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절을 암만 해도 소용이 없잖아요?”

바쁜 시간을 쪼개 108 염주도 돌리고 기도도 게을리 하지 않는 김 씨지만 절에 가서 보내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고백했다. 경로당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부처님의 화신이란 믿음으로 부처님을 뵈러 절에 가듯 늘 오토바이를 타고 경로당으로 달려간다.

김옥순 보살. 사진=박재완 기자.
“30년을 맞이하는 내년에는 좀 더 풍성한 잔치를 열 계획”이라는 김 씨는 “매년 돌아가시는 분들이 생겨서 낯익은 얼굴이 잔치에서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 더 잘해드려야 한다. 이고 지고 갈 것도 아니니까 떡 방앗간으로 버는 돈은 모두 모아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경로잔치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한 아들 내외가 착해서 엄마가 하던 일을 이어서 하겠다고 하니 여간 대견하지 않다고 은근히 자식 자랑을 잊지 않았다.

떡은 나눠 먹어야 제 맛이라는 옛말이 있다. 나누는 일로 떡의 제맛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는 서부패밀리 떡방앗간 김 옥순 사장의 오토바이가 출동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김 씨는 오늘도 최고의 쌀과 정성으로 빚어 만드는 떡만큼이나 달콤한 사랑을 오토바이에 싣고 경로당으로 향한다.
울산=글 천미희/사진 박재완 기자 |
2005-09-03 오전 10:18:00
 
한마디
아름다운 얼굴 고운 마음씨 매마른 대지에 핀 한송이 연꽃입니다.
(2005-09-03 오후 11:5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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