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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마을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나에게는 힘든 논일과 밭일 그리고 바닷일을 시키지 않았다. 또래들에 비해 곱게 자란 나는 대학에 와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만 찾아 다녔다. 그런 이유로 언젠가는 군대라는 곳을 다녀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시기를 잘 모르고 지나쳐버렸다. 결국 2001년 추운 겨울, 스물다섯이란 적지 않은 나이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 해 논산훈련소의 겨울은 내 인생에서 어느 때보다도 추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늦게 입대해서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던 나는 나보다 어린 전우들과 반말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렇게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로 전입하게 되었을 때, 나의 절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나이 어린 선임들의 다그침이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대에서도 나이 많은 나의 행동은 항상 눈엣 가시였다. 무슨 일은 할 때 마다 선임들은 ‘나이 먹고 군대 오니 힘드냐? 그럼 군대 빨리 오지?’ 라고 다그쳤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왔던 나에게 군대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힘에 겨웠다.
사람의 기가 약하면 귀신이 자주 붙는다고 하였던가. 그 즈음 나는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이등병 생활 6개월 동안 밤마다 가위에 눌렸다. 행정병이란 보직 자체가 잠을 많이 잘 수 없는 직책인데다가 밤새 꾸는 악몽은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부족한 수면시간으로 인해 나의 눈은 항상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러한 나의 눈을 바라보는 선임들의 꾸중은 더욱 심해졌다. ‘이등병주제에 하는 것이 뭐 있다고 눈이 빨개? 누가 보면 너 많이 힘든 줄 알겠다.’ 이러한 다그침은 군에 적응하는 시간을 더욱 길게 만들 뿐이었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며 가위에 눌리는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의 메마른 정신세계를 어루만져줄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던 중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던 서재덕 병장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 왔다.
일과가 끝날 무렵 그는 내가 근무하는 중대 행정반으로 와 시간 좀 내달라고 했다. 나는 내심 겁에 질렸다. “아! 또 집합이구나. 이번엔 내가 또 뭘 잘못했을까?” 이런 무거운 마음으로 서 병장을 따라 갔다. 우리 둘은 중대 앞 숲길을 말없이 걸었다. “군화발이나 주먹이 언제 날아들까?” 무서운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평소와는 달리 부드러운 말로 내게 말을 건냈다. “너 많이 힘들지? 다 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담배 한 개피를 건네며 자신의 가정사와 군생활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는 중학교 때 모두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 둘을 책임지고 키우다 나처럼 뒤늦게 군에 있대했다고 한다. 서 병장이 나이가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우리 중대장 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것 또한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의 나이는 31살이었으니 말이다. 서 병장의 위로와 격려는 나의 군 생활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내 나이가 25살이니 조금은 나이대접해 주겠지?”라는 생각으로 입대를 했고, 그동안 부모님께 모든 걸 의지하고 살았던 나약한 생활들이 너무나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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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 당시 군대에서는 ‘일인 일 종교’ 갖기 운동을 펼치며 일요일마다 신병들에게 종교행사에 참석하기를 권했다. 이는 신앙생활을 통해 신병들의 군대 부적응을 막는 방편으로 시행하는 것으로, 서 병장의 만남과 이 같은 부대 분위기는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후 일요일에 한번씩 자발적으로 불교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종교 활동은 무슨 특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 계급장을 버리고 법우들과 마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냄새가 배어나오는 포근한 곳을 찾았던 것이다. (계속)
불교행사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나의 군생활은 조금씩 변해갔다. 밤새 나의 단잠을 괴롭히던 악몽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악몽이 완전히 사라질 때 쯤 불교라는 종교는 나에게 오랜 친구 같고, 은인 같이 소중한 것으로 느껴지게 됐다. 생활에서는 늘 활기가 가득했고,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나이 많은 신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행정병이란 직책도 호재로 작용했다. 선임들이 없을 때나 틈틈이 시간 날 때 마다 독송집이나 불교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신심을 돈독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짧지만 열성적이었던 나의 신앙생활은 일병 계급장을 단지 두 달 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중대의 군종병이 제대할 때가 됐는데 법사님과 군종병이 날 후임 군종병으로 차출하고 싶다고 상부에 보고했기 때문이다.
중대 군종병이 된 이후로 좀더 신앙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여러 장병들에게 불교적인 생활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노력은 누굴 위해 보여주기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새벽예불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매일 법당청소를 했다. 새벽 예불을 모시는 사람이라야 봐야 법사님과 나뿐이었지만 정갈한 마음으로 예불을 모시고 싶은 나의 발원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달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순간 나의 머리를 강하게 치고 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서 병장이었다. 법당 생활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이제는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위안을 찾았기에 중대생활을 하고 있는 나의 전우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의리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놈.”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소리가 아우성 쳤다. 점심공양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부랴부랴 중대 내무반으로 달려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던가? 모두 연대 전술 훈련 때문에 작전에 투입됐다. 나의 시선은 서 병장의 관물대로 옮겨 갔다. 그의 계급장과 군번 그리고 이름이 적힌 표식은 없었다. 그는 제대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