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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산악인 오은선은 해발 8,750m 에베레스트 절벽에 꽁꽁 언 채 매달려 있는 박무택의 시신을 목격한다. 엄홍길과 박무택은 칸첸중가 설산에서 비부아크(야영장비 없이 야외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를 하며 생사를 함께 했고, K2와 시사팡마,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지명) 등정에도 동행한 형제 이상의 사이다.
“무택이는 나한테 등반 파트너 이상이에요. 그 놈은 내 친동생이나 다름없었어요.”
엄홍길 대장은 이미 예정돼 있던 로체사르(8,400m) 원정을 뒤로 미루고 에베레스트의 차디찬 설원 속에 외로이 누워있는 후배들을 가족의 품으로 데려올 결심을 한다. 마침내 18명으로 이루어진 휴먼원정대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초모랑마로 떠났다.
처음 휴먼원정대가 결성될 때 국내외 산악인들은 모두 ‘불가능하다’는 말만을 되풀이 했다. 시신이 있는 8750미터면 세계 제 2봉인 K2보다도 더 높은 곳인데, 과연 수습이 가능할 수 있을까란 물음에 모두들 회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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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한 원정이었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과 그 밑에 누워 있는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합니다. 특히 이번 등반 과정 내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의 상처를 곁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침내 77일간의 사투 끝에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해 에베레스트의 양지 바른 곳에 안장했다.
이 책은 엄홍길 대장이 이끄는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에 참여한 산악전문 작가 심산 씨가 그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낸 것이다. 책은 산 사나이들의 사선을 넘는 우정을 전해준다.
지난 7월 8일 MBC-TV를 통해 방송됐던 ‘아, 에베레스트’나 신문지상에서는 확인하지 못했던 고인들의 개인적인 면모, 원정지에서의 모습, 휴먼원정대의 진한 우정과 동료애를 잘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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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간 히말라야를 등반하며 저는 오직 정상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휴먼원정대 등반에서 한 번도 정상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것들을 되짚어보는 계기였지요.”
이런 엄씨의 고백처럼 그가 떠올린 것은 우정, 의리, 약속 등이었다. 오랫동안 빛바래왔던 단어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기도 했다. 8000m가 넘는 곳에는 예전에도 시신들이 있었다. 정상만을 보고 올라갈 땐 잠시 공포와 연민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이렇게 묻는 것이다. “히말라야 정상에 서는 것이 시신을 외면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일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내 도전을 포기할 수 없었던 휴먼원정대. 그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애, 우정, 의리, 약속, 희생과 같이 너무도 빛바랜 단어들의 소중한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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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한 악우(岳友)들의 혼을 거두기 위해 석달이라는 시간을 보낸 휴먼원정대는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아름다운 약속을 보여준 모범이 될 것 같다.
엄홍길의 약속 | 심산 지음 | 이레 펴냄 | 9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