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7.2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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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팔공산 나한대재 복원된다


팔공산 거조암의 500나한. 현대불교 자료사진.
고려시대 이후 사라졌던 나한대재가 복원된다.

나한기도 도량으로 잘 알려진 영천 팔공산 거조암(주지 현소)은 고려이후 700여 년간 단절됐던 나한재를 되살려 10월 22일 오전 10시 거조암 영산전(국보 제14호)에서 봉행한다고 최근 밝혔다.

나한이란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수행자’, ‘공양과 보시를 받을 만한 수행자’,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라는 뜻으로 아라한을 줄여서 부른 말이다. 당나라 현장 스님의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에 따르면 “스님들을 위하여 큰 법회나 5년마다 무차대회를 열면 십육나한과 권속들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공양을 받으며 시주자에세 커다란 과보를 얻도록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나한재가 본격적으로 봉행된 것은 고려 때, 나한재를 봉행하여 기우(祈雨)와 구복(求福) 국난극복 등을 기원했다.

거조암은 “현대와 같이 복잡하고 혼란한 시기에 ‘정법의 시대에는 불교를 지키고, 말법의 시대에는 불자들의 복전이 되어 열반의 과보를 얻게 했다’는 나한 사상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나한재를 복원 봉행하게 됐다”며 “정체성 상실과 심각한 경제난으로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큰 위안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나한재는 법요식에 이어 명종, 봉헌무, 신중작법, 상단권공, 나한권공, 나한 육법공양 순으로 진행되며, 국악인과 인기가수 등이 출연하는 축하음악회도 열릴 예정이다.

거조암 영산전은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054) 335-1369



나한재란?

나한재(羅漢齋)는 나한신앙에서 비롯됐다.
중국의 나한신앙은 나한도 그림을 통해 널리 퍼졌으며 당 말에는 나한을 공양하는 나한공(羅漢供)이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에서 923년 태조가 양나라에 보낸 사신 윤질이 5백나한상을 갖고 귀국,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봉안한 이후부터 나한신앙이 퍼졌다. 고려시대 나한재는 국가적인 행사로 치뤄졌는데, 고려왕실에서는 1053년 문종이 신광사에서 나한재(羅漢齋)를 베푼 것을 시작으로 무려 28회의 나한재를 베풀었다. 나한재를 베푼 주 목적은 기우제였다. 이외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거나 국왕의 장수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주로 구복 중심으로 서민사이에서 신앙됐다. 나한은 6신통과 8해탈을 모두 갖추어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복전(福田)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나한재는 진관사의 수륙재와 길상사의 나한재가 병행돼 개설된 것처럼 진혼의식으로 치러졌다. 조선초 왕실에 의해 각 사찰마다 나한상을 조성하거나 나한전을 건립하는 일도 잦았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도 나한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화가 전해지며, 태종 때와 세종 때에도 나한재가 베풀어졌다. 조선후기 역시 구복을 중심으로 발원자의 장수와 극락왕생 그리고 정각을 얻도록 하는 등 복합적인 성격으로 전개됐다.
배지선 기자 | jjsunshine@hanmail.net
2005-08-26 오후 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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