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3.2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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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寫經)으로 만난 부처님 上
[부처님 감사합니다]




어릴 때부터 불교가정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부처님께 귀의했지만 절을 찾는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간혹 마음이 심란할 때면 절을 찾곤 했는데, 절에 가서도 법회에 참석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법당에서 삼배만 하고 돌아오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4년 동안 부산 지역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나는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 1987년, 학교를 그만두고 친척 어른이 운영하는 중견 건설회사에 취직하게 됐다.
그림=문병성
수주담당 임원이었던 나는 주로 조달청 등의 관공서에서 입찰에 관여했다. 입찰 방법은 지금의 로또 복권 추첨과 같아서 운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곤 했다. 특히 수주담당 임원에게는 조건 좋은 관급공사를 많이 수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추첨 운이 따르지 않으면 수주 담당자의 마음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나의 한순간 실수로 회사의 존폐가 결정되는 일이어서 하루하루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순수한 학생들 속에서 생활하다가 경쟁이 치열한 건설공사 수주 현장에서 생활하다 보니 마음의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무로 일하면서는 회사의 보증도 서게 됐다. 당시 건설회사의 관례상 임원이 회사의 보증을 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 나와 내 가정의 발목을 잡는 족쇄임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결국 얼마 후 나는 회사의 보증을 선 죄로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됐고, 집안 살림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졸지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내가 먼저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집 근처 절에 자주 나가 기도를 했고, 그 무렵부터 사경을 시작하게 됐다. 오래 전부터 붓글씨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가끔 붓을 잡아 보곤 했지만 막상 사경을 한답시고 한지 위에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보았건만 정말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 끊어내기 힘든 번뇌를 떨치기 위해 밤을 새워 붓 끝에 매달려 보았지만 글 솜씨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씩 사경한 것이 마음에 들 때면 후일 이것을 남에게도 나눠 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좀 더 열심히 사경을 했다.

당시에는 특히 <반야심경> 270자에 매달렸다. 회사를 마치고 오면 매일 저녁 <반야심경>을 사경했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3~4시간은 족히 걸렸는데, 어떨 때는 새벽 1~2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회사에 나갈 때는 전날 저녁에 사경한 것을 품에 지니고 나갔고, 그럴 때면 하루 종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물론, 입찰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일이 잘 풀려가자 나 자신도, 우리 가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그럴수록 무슨 일이든 행동하기 전에 남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자고 자신을 추스르곤 했다. 이런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피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기도와 정진에 매진했다.

매일같이 사경을 하다보니 경전의 글씨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쓰는 것이 곧 기도와 다르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됐다. 또한 사경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경전을 다 외우게 됐고, 신심도 따라서 커져 사경과 독송 그리고 예불하는 것을 매일 거르지 않게 됐다. 또한 경전에 담긴 뜻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관련 서적도 찾아 읽게 됐다.

10년 가까이 사경을 해 오던 중 부산 전포동에 있는 기봉사라는 절의 법당 보살이 나를 찾아와 “사경의 복보다 보시의 복이 크다”고 하면서 사경한 <반야심경>을 사찰 신도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해 왔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보시하는 일이 될 수 있고 아울러 복을 쌓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 보관하고 있던 사경본들을 하나하나 가려서 500여 점을 그 법당 보살님께 보내줬다.

그 이후 1997년부터는 <금강경>에 매료되어 독송하고 사경하는 것을 더 큰 공덕으로 보고 수년을 힘써 왔지만 아직도 글자와 뜻에 매달려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으니 정말 하근기임을 실감하고 있다.

회사일이 안정을 되찾으면서는 주말마다 전국의 사찰을 두루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렸는데, 그 중에서도 기도처로 이름 있는 봉정암과 홍련암, 보리암, 보문사, 구인사 등을 자주 찾았다. 특히 24시간 염불소리가 그치지 않는 봉정암과 법당에 앉아 신년 해돋이를 볼 수 있었던 보리암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또 구인사 대조사전이 개관하는 날에는 첫 참배를 올리겠다는 생각에 산 중턱 사리문 앞에서 1시간 넘게 기다려 제일 먼저 법당에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새벽바람에 온 몸이 얼어 버린 듯 몸을 가눌 수 없어 절도 제대로 못하고 나온 기억도 오랫도록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기도처인 산사에서 맞이하는 밤은 도회지에서 찌든 세속의 나의 마음을 완전히 여윈 듯 편안하게 만들었고 밤새도록 울려 퍼지는 염불소리와 목탁소리는 세속을 떠난 세계로 나를 인도하는 듯 했으며 나도 모르게 밀려오는 그 어떤 느낌은 말로 잘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이 감정과 내 지극한 기도가 합일하면 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도처를 자주 찾게 되었다.

지난해 겨울, 영화사 미륵전에서 백일기도를 했을 때도 생각난다. 미륵전이 대웅전 뒤편 산중턱에 자리한 임시 건물이어서 한기가 뼈 속까지 파고드는 듯 했지만 수백 명의 도반들가 함께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모두가 기도에 전념하여 추위는 모두 잊은 진지한 모습이었다. 나도 분위기에 끌려서 신심이 배가 되어 열심히 기도를 했다. 백일기도가 거의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던 중 우리 회사에 공사가 낙찰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마도 그것은 열심히 기도를 올린 나에게 주신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되어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백일기도를 회향하면서 같이 기도한 모든 보살님들의 소원이 성취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수해(서울 노원구 하계동) |
2005-08-23 오전 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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