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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에게 배우는 지혜로운 자식교육
자식교육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렵긴 매한가지다.

5백년을 이어오는 명문가들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자식을 교육했을까.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은 인성 교육과 생활 교육을 중시했던 역사 속 위인들의 자녀 교육 방식을 통해 현대의 부모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지침들을 조목조목 소개하고 있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은 10년동안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편지를 통해 자녀교육을 할 정도로 두 아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자녀교육의 해법을 위해 찾은 명문가는 10집. 풍산 류씨의 서애 류성룡, 고성 이씨의 석주 이상룡, 재령 이씨의 운악 이함, 양천 허씨의 소치 허련, 진성 이씨의 퇴계 이황, 해남 윤씨의 고산 윤선도, 나주 정씨의 다산 정약용, 한양 조씨의 호은 조전, 파평 윤씨의 명재 윤증, 그리고 경주 최씨인 경주 최부잣집이다.

이 책은 바로 이들의 지조와 자긍심을 대대로 지켜오며 자녀교육의 모범을 실천해온 대표 명문가들의 종가와 고택을 직접 방문, 그들의 생생한 증언과 모습들을 담아냈다. 특히 이 책이 밝히는 명문가들의 공통점은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과 헌신, 그리고 자식들에게 암묵적으로 영향을 끼친 아버지의 역할이다. 가족이란 틀 안에서 행해졌던 종가의 교육법과 교훈적인 내용들을 통해 부모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던져주며, 더불어 자녀를 경쟁력 있는 인재로 키워내기 위한 해법을 알려준다.

먼저 서애 류성룡 종가를 들여다보자. 임진왜란 때 영의정 등 최고위직을 지낸 서애 류성룡(1542~1607)은 그 바쁜 와중에도 자녀들의 학문을 점검 독려하고 때론 따끔하게 질책한다.

서애는 두 아들에게 “학문은 정밀히 사색하고 자세히 질문하는 것을 중요시 하는데 언제나 깊이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궁금한 것이 없어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물론 서애 스스로는 책 읽는 아버지의 전형을 모범적으로 먼저 보여준다. 그래서 일까. 지은이가 서애 종가에서 찾아낸 교육 비결은 “평생 책 읽는 아이로 만들라”는 것이다.

유림의 기둥인 퇴계 이황(1501~1570)은 될성부른 후학들과 자기 자식을 함께 교육시키며 인맥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데 무던히 애썼다. 또한 퇴계는 학문이 깊고 똑똑한 제자가 있으면 아들과 손자, 다른 제자들에게 소개해주고 함께 공부하게 했다. 똑똑한 아이나 공부에 뜻이 있는 아이끼리 더불어 공부하면 아이들은 더 경쟁심을 발휘해 학업에 열중하게 되고, 한결 뛰어난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백의정승으로 꼽히는 명재 윤증(1629~1724)은 자녀교육을 위해 벼슬길마저 포기했다. 백부 윤순거의 영향으로 일종의 사립학교 격인 ‘종학당’을 세워 나이와 학문 정도에 따라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특히 종가 사랑채는 담장이 없었다고 한다. 남들 앞에 부끄러울 것도 감출것도 없다는 의미였다.

자녀 교육으로 유명한 당대 학자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다산은 유배중에도 편지로써 자녀들을 독려했다.

다산은 자신의 유배로 인해 집안이 위기에 놓이자 자녀들에게 문명세계인 서울을 떠나지 말 것, 독서에 힘쓸 것, 재물을 나눠줄 것, 근검절약 할 것 등을 당부했다고 한다.

항상 남에게 ‘양보하며 밑지고 살라’ 것을 가훈으로 정한 운악 이함(1554~1632)은 자녀들이 동네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오면 오히려 칭찬을 해주지만, 때리고 들어오면 크게 혼을 냈다고 한다. 이함의 17대손인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주는 ‘지고 밑지고 살라’는 이 집안 가훈덕에 인재들을 모아 창업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1587~1671)는 18년간 유배지에서 보낸 인물. 자신의 삶 때문인지 고산은 자식들에게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말라, 혹 벼슬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또한 고산은 시서화뿐만 아니라 유학과 경제 지리 의학 음악 등에도 능했다. 서재인 녹우당은 잡학도서관과 흡사해 조선후기 호남 학문의 요람이 됐다. 대대로 수집한 수많은 서적들은 후손들이 지성의 바다에 빠져들게 하는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경주 최부잣집은 최진립(1568~1636)에서 최준(1884~1970)까지 12대 3백년 동안 존경받는 부자였다. 일제치하에서는 백산상회를 설립해 상하이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지원했던 최준은 3백년 된 대저택과 논밭 24만평, 860만원 등 전재산을 대구대학 계림대학(현 영남대) 설립기금으로 내놨다.

이런 집안의 가훈은 과연 어떤 무엇일까. 첫째,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말라.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말라.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주변 1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여섯째,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다.

책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가문은 교육자들이 많은 집안이다. 망명중임에도 이상룡의 아들은 자기부인에게 논어와 맹자를 가르쳤고, 부인은 남편에게 맹자를 가르쳤다.

안동정착 5백여년 동안 석주 가문에서 과거로 벼슬한 사람은 1명이지만 석주 이후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 받은 이가 9명이다. 그 비결은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자녀교육만은 결코 소홀하지 말라였다. 또한 명가로서의 자긍심을 지키라는 것이다. 한 후손은 “우리 집안은 독립운동 하느라 요즘에도 넉넉하지 않다. 그렇지만 잘사는 친일파들에게 조금도 꿀릴 게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최효찬 지음
예담 펴냄 | 1만3천원

김주일 기자 |
2005-08-16 오전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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