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수행 생활 가운데 장판때를 가장 많이 묻히는 곳이 강원일 것이다.
강원생활이란 단순히 강사스님의 강의를 듣고 몇 권의 책을 보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반들간의 관계, 선 후배간의 질서, 어른에 대한 공경심, 일상적 의례인 습의, 철학적 사상을 총망라해 배우고 익히는 곳이기에 그렇다.
그것뿐이 아니다. 출가수행자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건강이다. 건강관리가 잘 돼야 수행도 잘 하는 법이다. 건강관리법, 즉 운동을 배우는 곳도 강원이다.
나는 강원에서 운동을 익혔다. 축구와 배구 탁구 평행봉 역기에서 곤봉 스케이트까지. 해인강원의 축구는 유명하다. 지역은 물론 대구나 부산 조기축구회에서까지 친선게임을 하자고 했고 육사생도들과도 게임이 이루어졌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은 공부를 잘하는 것은 물론, 지고 이기는 승패에 관계없이 선 후배와 도반사이를 서로 끈끈한 끈으로 이어주었다.
공부와 운동이 즐겁고 재미있으려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이 수반 되어야 하고 건강이 따라 주어야 했다.
내가 당시 45 킬로그램였다. 이 몸무게로 따라붙으려 했으니 무리였을 것이다. 코피를 일년간 흘렸다. 처음에는 코피가 쏟아져 멈추지를 않더니 일년이 다 될 즈음에는 얇은 여름 장삼이 콧등만 스쳐도 코피가 터졌다.
늘 어지러웠고 간병실에 누워 있어야 했다. 연일 코피를 쏟고있는 나를 본 재무스님은 집에 돌아가 건강해지면 다시 오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서글펐다. 부모 형제 멀리하고 부처님 법 배우러 온 사람을, 부처님 법 배우다 아프다고 집으로 돌려보내면 부모인들 이해하겠는가? 그러니 코피 흘리는 것도 숨겨야 했다.
가을쯤 비로암 토굴에서 공부하시던 은사스님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셨다. 나를 보더니 ‘미련한 곰’이란다. 가야의원에 데리고 가셨다. 거기서 원인을 모르겠다고 해 다시 더 큰 병원인 야로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무슨 치료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 후로 나는 지금까지 코피를 쏟은 일이 없다. 병원에 가면서 택시도 생전 처음 탔다. 작은 차가 얼마나 편안하던지 신기해 하면서 잠이 든 기억이 난다.
현문 스님은 나를 다시 강원에 데려다 놓고 털모자를 씌워 주시면서 “공부하다 죽어라!”고 하셨다. 수행자가 들어야할 말 같아 정말 기뻤다.
나는 이일이 있은 뒤로는 후배들이 아프다고 하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언젠가 죽어야 되는 것이니 공부하다 죽어라” 한다.
육신의 쇠락은 막을 수 없지만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보람된 일이냐고....
수행자는 수행으로 얻은 힘이 노후복지가 되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출가수행자 요양원이 있으면 했다.
크든 작든, 귀중하든 사소하든 모든 것에는 시절인연이 있는 법이다. 그 인연이 속시원하게 눈에 보이거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원인에 따른 조건 변화이기 때문에 인연이 있다고 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익었다가도 성글어지고 성글다가도 익어지며, 처음이 있듯 인연의 마지막이 있고, 마지막인 듯 하다가도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느낀다.
1995년 내가 서울 봉은사 포교실장 소임을 보고 있을 때다.
은사스님께서 약수암으로 부르시더니 성북동 대원각을 절로 만들려고 하니 일을 봐 주어야 되겠다고 하셨다. 대원각을 법정 스님께 기증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십년 전부터 떠돌았지만, 내가 이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대원각은 음식점으로 있으면서 2년이라는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법정 스님은 조건부 기증을 거부하고 계셨고, 그 사이 많은 스님들이 다녀갔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모 교회에서 백지 수표를 제시했다는 말도 떠돌았고, 여차 하면 대원각을 과학 재단에 기증하겠다는 소문도 있었다.
더욱이 소유자인 김영한 보살의 건강이 나빠 오늘 이러는가 싶으면 또 한없이 기다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김보살은 불자가 아니었다. 백석 시인을 사랑한 분으로 <내 사랑 백석>이란 책을 냈다.
은사스님은 그분을 자주 찾아뵈었고 대화를 하셨다. 곁에 있으면서 대화를 거들기 위해서는 <내 사랑 백석>이란 책을 읽어야 했다.
나는 그 때 지인들이 뭐 하느냐고 물으면 ‘성북동 비둘기’ 잡으러 다닌다고 했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렀지만 결국 해냈다.
송광사 중앙분원, 창건주 김영한, 사명 대법사로 사설 사암 등록을 하고 재산 기증 절차를 마쳤다.
보도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은사스님에게 물으니, 스님께서는 법정 스님이나 김영한 보살이 드러내 보이는 것을 싫어하니 그만 두라고 하면서 “누가 살든 무엇을 하든 어떻게 되든 큰일은 욕심내지 말고 불국토가 되는데까지만 하자”고 하셨다.
사찰로 등록한 이년 후,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김영한 보살은 법정 스님께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고 절 이름도 ‘길상사’로 바뀌었다.
나는, 현문 스님께서 당시 하신 “누가 살든, 무엇을 하든, 어떻게 되든, 큰일은 욕심내지 말고 불국토가 되는데까지만 하자” 이 말씀을 욕심을 줄이는 수행의 좌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