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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대사는 승병들을 규합해 1592년 12월 평양성을 공격했다. 왜군들은 성에 불을 지르고 대동강을 건너 도망갔다. 그림은 고려대박물관 소장 평양성 전투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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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해 7월,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은 73살의 노구를 이끌고 묘향산 보현사를 중심으로 전국의 승려를 모집해 의병을 일으켰다.
금강산 유점사에 거처하던 사명당 유정(1544~1610)도 강원도 금강산에서 승병을 모았다. 이들이 평양에서 합류해 12월 10일 평양성을 공격하자 고니시 부대는 성에 불을 지르고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도망갔다. 사명당은 당시의 상황을 중사(中使, 임금의 명령을 전하던 내시)에게 이르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진영에서 만나 뵈니 이것 정녕 우연인데/ 깊은 밤 북소리를 함께 듣게 되었어라/ 남방의 일 어떤가고 임금님 물으시면/ 머리 센 늙은 중이 성 지킨다 일러 주오.” (‘중사와 작별하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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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 유점사에 거처하던 사명당 유정도 강원도 금강산에서 승병을 일으켰다. 통도사 박물관 소장 사명당 진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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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만을 기억하기 쉽지만,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전국 곳곳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과 관료들이 백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사이 백성들은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유생 곽재우(1552~1617)는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고 전라도 담양에서는 선비 고경명(1533~1592)이 백성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분충토적(충성을 다해 적을 친다)’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왜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산중의 스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명대사는 스스로 승병 대장이 되어 잠깐 사이에 5천여 명의 승려를 모아 수많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고, 사명당은 전쟁이 끝난 후 외교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조선인 포로 송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사명대사는 함경도 백성들에게 보내는 격문(格文)에서 “그대 부모 된 자들이여! 나라가 망하면 집을 어이 보전하며, 아버지가 있는데 자식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부디 자제들을 잘 타일러서 나라를 저버리지 말게 하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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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대사는 73살의 노구를 이끌고 승병을 조직해 왜군에 대항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산대사 영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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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과 승려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지만, 전란 앞에서는 이 같은 차별도 무의미했다.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1554~1593)는 사찰에 격문을 보내 자신의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할 일을 들어 “생각건대 불교 교리는 자비로써 근본을 삼았거니 나의 오늘의 처지가 어찌 슬퍼할 일이 아니겠는가?”라며 승병 조직을 촉구했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는 이처럼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었던 서산대사, 사명당, 곽재우, 조헌, 고경명 등 의병장 9명의 작품을 모은 책이다. 가려 뽑은 420여 편의 시와 격문 20여 편에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채 나라를 위해 죽어간 의병들의 활약상과 고향과 나라를 사랑하는 감정이 애절하게 담겨 있다. 특히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작품에서는 종교인이면서 나라를 위해 칼을 들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한 아픈 성찰을 읽을 수 있다.
서산대사는 ‘남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며’에서 “하늘을 높고 땅은 두터우니/ 우리 조선은 만년 세월 영원하리라”며 나라 사랑을 표현했고, 곽재우는 ‘싸움터’라는 시에서 “고함 소리, 북소리는 바닷물을 삼키런 듯/ 번뜩이는 칼날들은 붉은 해를 덮었는데/ 수천 명의 원수들을 삼대 베듯 하였어라”며 당신의 투쟁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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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대사와 사명당 유정을 비롯한 9명의 의병장의 시문을 모은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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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출판사가 북한 문예출판사의 <조선고전문학선집>을 <겨레고전문학선집>으로 다시 펴내는 시리즈 중 9번째 책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오희복 박사 부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웅글다(소리가 깊고 굵다), 고삭다(곯아서 썩거나 삭아 빠지다), 보리가을(보리를 거두어 들이는 일) 등 우리가 흔히 쓰지 않는 북한 방언을 그대로 살려 우리말의 풍부한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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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난리를 당하매>(곽재우 외 지음, 오희복 옮김, 보리, 3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