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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60주년]일제잔재 어떻게 청산할 건가

30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 구하 스님 등 본사주지들의 1917년 일본사찰 기념사진.
일제치하 36년간 한국불교는 수많은 문화재들과 사찰재산을 침탈당하고 각종 제도와 형식이 ‘일본화’되는 치욕을 당했으며, 적지 않은 불교 인사들이 친일행위를 함으로써 극도의 내우외환을 겪었다.

8월 15일은 그 압제와 혼란으로부터 벗어난 지 꼭 60년이 되는 날이다. 광복 60주년을 축하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진정으로 독립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일제의 잔재는 여전히 우리 불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진정한 독립은 그 잔재를 벗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단죄를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의 교훈을 내면화해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찾자는 의미다. 따라서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를 종단, 문화재, 사찰 조경, 불교학 등 네 분야를 통해 짚어본다.



역사인식 부재 속 정체성 못 찾아
정신적 ‘잔재’부터 뿌리 뽑아야



조선불교 조계종이 1942년 헌금을 모아 일제에 기증한 전투기 조선불교호.



종단체제는 아직도 94년전
교구본사 중심 체제 구축



‘교구본사 중심 본말사 체제’는 일제가 한국불교에 남긴 가장 큰 흔적 중 하나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시행하면서 ‘본말사 체제’를 갖춰 나갔다. 이전까지 특별한 조직을 갖추지 않고 자율적으로 관리됐던 사찰들이 30개 본사와 예하 말사로 구성된 ‘본말사 체제’에 편입된 것이다.

조계종의 현 25개 교구본사 중심 본말사 체계도 바로 1911년 일제가 공포한 사찰령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제는 여기에다 사찰령 시행규칙을 만들고 사찰 운영의 내규인 사법(寺法)을 제정해 사찰 운영의 틀을 구축했다.

사찰령 등의 제정 이유는 본사 주지를 통한 한국불교 통제권 장악이다. 일제는 주지에 대한 인사권과 사찰에 대한 재산권을 확보해 한국불교를 식민 통치에 이용하려 했다. 한국불교는 일제 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상처도 받았다.

본말사 체제를 종교적 차원이 아닌 행정 편의적으로 개편한 것은 한국불교를 관료화하는 주요 원인이 됐다. 이 과정에서 본사 주지에게 인사권과 재산권이 집중됐으며 승가의 지계정신과 개혁의지는 크게 쇠퇴했다. 대중에게 봉사하는 직책인 주지가 대중 위에 군림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산중공의제도가 유명무실해진 것도 큰 손실이다. 대중의 의견에 따라 사찰의 일을 결정하던 산중공의제도는 주지가 일본관리의 임명을 받으면서 근간부터 흔들리게 됐다. 게다가 사찰령은 대처(帶妻) 제도를 합법화해 훗날 비구 대처 분쟁의 원인이 됐다.

불학연구소 박희승 연구차장은 “산중총회법, 총림법이 만들어지면서 산중공의제도는 어느 정도 복원됐다고 하지만 과도한 주지의 권한을 조정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과제로 남아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에 따른 국가 행정체계의 변화에 맞도록 교구본사 체제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타진해야 할 부분이다.

일본 도쿄 대창집고관에 소장돼 있는 고려후기 건칠불좌상



불교 재산 대거 망실



임야 농지 등 불교 정재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사찰 재산을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사찰령이 규정한 재산제도는 주지의 통제에 초점을 맞춘 기형적인 것이다. 일제가 친일적인 주지에게 재산 관리권을 부여하고 1926년 대처식육(帶妻食肉)을 허용하도록 사법(寺法)이 개정되면서, 처첩을 거느린 주지가 불교재산을 개인 소유로 넘기는 일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완벽하지 않은 재산권 제도는 해방 이후 정화 사태와 한국전쟁 등 혼란기를 겪으면서 결국 불교 정재의 대대적인 망실로 이어졌다.

조종래 前 조계종 총무국장은 “정화 때 사라진 불교재산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교육과 육영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사찰 재산을 사사로이 팔아버리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고 증언했다. 또한 100여 곳에 달한 일본사찰들의 재산이 온전히 한국불교로 이전되지 못한 것도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일제시대 등 혼란기에 사라진 사찰 정재에 대한 연구가 종단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기 위한 장기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일본 교토 료우이지 방장선원의 후원. 전형적인 인공 조경의 예다.



정교분리 원칙 훼손



조선왕조의 탄압을 받아 산으로 쫓겨난 한국불교는 일제시대에도 자주적 종단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일제가 한국불교를 어용화해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불교계 스스로가 자주적 종단건립에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수많은 스님들이 쉽게 친일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해방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한국불교는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권에 박수를 쳐주고 이른바 ‘기도법회’를 열어주었다. 비구승에 의한 ‘정화’가 이승만 정권의 유착 속에서 진행됐으며, 5ㆍ16 이후 통합종단의 출현과 분쟁, 10ㆍ27법난 등도 정치권 변화에 따라 한국불교가 어려움에 빠진 모습들이다. 1980년대 한국불교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고 각종 호국법회를 통해 군사정부에게 정당성을 주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도 어렵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불교계가 사법부 등 외부에 의존해 불교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국립공원 입장료, 정부보조금 등 정부에 의존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한국불교의 자립성도 높아질 것이다”고 강조했다.



종단 난립



수많은 종단들의 난립 현상도 일제가 한국불교에 남긴 상처다. 일본불교의 영향인 대처승 제도가 해방 이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면서, 한국불교는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맛보게 됐다.

이후 종단은 분열과 창종을 거듭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종단처럼 종지 종풍 종조 소의경전 수행법 등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1962년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되면서 종단 창립은 ‘정부에 등록’하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일제 시대부터 활동하던 불교단체들이 종단등록을 하면서, 종단 숫자는 18개로 불어났다. 불교적 종단관이 뚜렷지 않은데서 탄생한 종단은 1988년 불교재산관리법 폐지이후 자율이라는 이름아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현재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소속 종단만도 26개에 달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종단까지 합한다면 무려 200여개의 종단이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 정체불명의 종단들이 불교 이미지를 흐리는 일은 이런 데서 연유한다.

한국불교종단협 김석오 총무차장은 “불교계가 자율적으로 비불교적인 종단 등을 걸려내는 ‘필터링’ 작용을 할 협의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종지 종풍을 가진 종단들 간의 통합을 위한 노력 역시 요구된다.


경북 W사의 법당 앞뜰. 석탑 주위에 정원을 꾸민 것은 한국불교 전통방식에서 크게 벗어난다.


日에 있는 우리 문화재


지난 6월 18일 동악미술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는 고려불화 한 점이 소개됐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7천여 위의 작은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갖춘 이 불화는 고려불화분야의 권위자인 정우택 동국대교수(불교미술)가 일본 고베 시립박물관에서 찾아냄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지게 됐다.

이번 발견은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한국의 불교문화재가 일본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줌과 동시에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야말로 불교계의 과제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줬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소장처가 확인된 해외 소재 한국문화재는 20개국에 7만5천여 점. 이 중 3만5천여 점이 현재 일본에 있다.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은 것까지 따져보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10만여 점이 일본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많은 문화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매우 미흡한 상태다. 일본 소재 한국 문화재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약탈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에 대해 반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 하지만 논리와 주장만으로 약탈문화재를 되찾아오기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고 보면, 반환을 위한 노력과는 별개로 한국불교문화재 실태조사 및 학술적 연구가 절실하다.

일본에 있는 한국 불교문화재의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개인 소장 문화재가 사라져버려도 알 방법이 없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 못지않게, 멸실될 우려가 우리에게 큰 걱정거리”라며 “활발한 연구를 통해 국제적으로 한국불교미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일간의 협력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주축으로 해외문화재 현지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기에는 조사 진행 속도가 너무 느리다. 해외 소재 한국문화재 7만5천여 점 가운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2년부터 지금까지 현지조사한 수량은 7천여 점에 불과하다.

또 소장처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지다보니 상대적으로 불교문화재에 집중되지도 못하고 있다는 점도 만족할 수 없는 대목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현지조사 가운데 불교문화재를 집중 조사한 것은 1995년 일본 나라 및 교토 지역 박물관과 사찰 10개소를 대상으로 한국불화 41점을 조사한 것이 유일하다.

따라서 불교미술사를 전공하는 국내 개별 연구자들은 각자의 관심에 따라 직접 해당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연구자료를 축적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그리 여의치 않다. 특히 일본 사찰에 소장된 문화재의 경우 접근이 쉽지 않다.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미술사)는 “한·일 양국의 국립박물관이나 공공기관 사이에 협력은 원만한 편이나 일본 사찰은 폐쇄적이어서 협력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며 “양국 불교계가 공동연구를 진행한다면 그 같은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1997년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에서도 일본사찰에 있는 한국문화재 실태조사에 관해 협의한 바 있어,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 등을 활용해 공동연구를 추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한·일 불교계가 불교미술을 공동연구한다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생각보다 크고 다양하다.

일본에 있는 한국불교문화재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면 미술사 연구를 위한 자료가 증가하는 셈이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은 “미술사 연구에서 1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료의 수량”이라며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증가하면 불교미술 이론 정립이 훨씬 수월해진다”고 말했다.

그밖에도 한·일 불교미술교류관계 확인함으로써 한국불교미술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동아시아불교미술사 정립하며 나아가 한·일 불교계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도 공동연구는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강유신ㆍ박익순 기자 |
2005-08-12 오후 7:06:00
 
한마디
조선불교 조계종이 1942년 헌금을 모아 일제에 기증한 전투기 조선불교호. / 30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 구하 스님 등 본사주지들의 1917년 일본사찰 기념사진.. 사진에 대한 설명이 바뀌어 실려 있네요...
(2005-08-15 오후 4:4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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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조에서 겨우 살아남은 우리의 말없는 훌륭한 스님들 함구 그 자체가 수행공덕의 기본으로 삼고 그나마 불교를 지켜주신 것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멸실된 문화재가 불교 뿐입니까? 현대 자본에 젖어있는 불교계는 각성하고 문화재 보호라는 미명하에 시설 불리기에 급급 기존시설은 방치하는 우를 범하진 말았으면 하네요.해외에서 먼저가 아니라 교계가 인화단결해서 부처님의 뜻을 받든다면 그 가피와 원력으로 모두 회수 가능 하다고 봅니다.성불하사요.
(2005-08-15 오전 7: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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