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있던 시기, 240년(1011~1251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제작된 <고려대장경>은 현존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완벽한 것으로 꼽힌다. 한 마디로 한국불교 1천700년의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같은 자존심도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1925년 제작된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불교학자들이 <고려대장경>보다 <대정신수대장경>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불교학자들이 <대정신수대장경>을 선호하는 것은 표점이 찍혀 있어 읽기 편한데다, 학자들 사이에서 <대정신수대장경>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대정신수대장경>의 위상은 이미 세계적이다. 뒷전으로 밀려난 <고려대장경>의 오늘은 일본불교학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불교학의 현실을 보여준다.
한국불교학이 일본불교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일본의 불교학 인구가 3천여명에 달하는 반면 한국은 100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열세에 있고, 역사 또한 일천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서구에서 배워온 것은 불교의 문헌을 발굴, 수집, 분류, 교감(校勘), 고증 주석하는 문헌학과 언어학적 방법론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치밀하게 인문학 연구의 기초가 되는 불교학 관련 자료집성·색인·목록·사전류 편찬에 몰두했다.
그 결과 일본은 <대정신수대장경> 외에도 <나카무라 불교어대사전(1974)> <망월불교대사전(1936)> 등을 간행했고, 대장경류만 해도 <일본대장경(1921)> <대일본불교전서(1922)> <국역대장경(1932)> <국역일체경(1933)> <남전대장경(1941)> 등의 엄청난 결과물을 쏟아냈다. 이런 참고자료들은 오늘날 국내의 불교학 연구자에게 훌륭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불교학계의 눈에 띄는 성과로는 36년 걸려 완간된 <한글대장경(2004)>를 비롯해 지난해 7권이 나온 <가산불교대사림>과 14권째 발간된 <한국불교전서>, 그리고 전산화된 <고려대장경> 등을 꼽을 수 있는 정도다. 일본에 비해 상당히 뒤늦은 셈인데, 큰 원력을 세운 몇몇 선각자들이 힘겹게 이끌어가고 있다.
고영섭 동국대 교수(불교학)는 “딱히 내놓을 만한 한국불교 통사가 없는 현실이 우리 불교학계의 허약함을 보여 준다”며 “통사를 내지 못하는 것은 각론 연구가 부족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근대불교학 형성에서 일본의 영향은 지대했다. 김동화·조명기 선생 등 대부분의 1세대 불교학자들이 일본에서 공부했다. 역경 및 자료집성 등 학문의 기본도 미흡하고, 연구인력도 없는 국내 상황에서 일본에서 나온 1차 자료와 2차 자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근래 들어 지식의 원천이 서구 여러 나라로 다양화되고, 동국대 등에서 박사가 배출되는 등 자체적인 학문역량이 강화되면서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완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오랜 동안 일본불교학 편향성이 학계를 지배해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불교학이 그간 보여 온 △순수교학에 치우쳐 사회현안에 무관심한 경향 △문헌학적 방법론에 충실해 자기철학 전개가 미진한 점 △어려운 용어 사용으로 대중화에 실패한 점 등은 일본불교학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 안양규 동국대 교수(불교학)는 “일본의 불교학이 훈고학적으로 흐르다보니 대중을 위한 용어 개선을 소홀히 하게 되고, 창조적인 새로운 시각이 나오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며 “일본불교학을 답습했던 한국불교학도 그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물론 문헌학적 방법론의 강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평래 충남대 교수(불교학)는 “문헌학을 부처님 말씀에 의거하기 때문에 오류가 적은 반면, 창의적인 글을 고집하다보면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크다”며 “문헌학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방 60년을 맞으면서 한국불교학계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불교생태철학을 비롯해 생명윤리·낙태·사형 등 사회현안에 대한 답을 불교전통 안에서 찾아내기 위한 연구라든가, 또 인문학으로 연구되는 불교를 “불교 없는 불교학”이라고 비판하면서 등장한 종범 스님의 승가학이나 신앙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는 김성철 동국대 교수(불교학)의 체계불학 등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김성철 교수는 “한국 불교학의 활로는 전통불학의 부활이 아닌, 신앙·수행과의 결합에서 모색돼야 한다”며 “신앙과 수행이 종합된 진정한 불교학을 정립하는 것은 종파적 이해가 엇갈리는 일본불교학이 할 수 없는, 한국의 불교학만이 해낼 수 있는 역할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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