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은 종교인이기에 앞서 수행자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치열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해야만 수행자인가. 부처님 말씀을 널리 전하는데 원력을 세운 부루나 존자 같은 설법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자 원력을 세운 삼장법사 같은 학승, 글을 써서 문서포교에 앞장서는 스님, 부처님의 계율을 정립하고 계율에 따라 사는 율사스님 등은 수행자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은 다만 형식상의 구분에 불과하며 그 마음이 중요하다고 본다. 아무리 선방에 많이 다녀도 나중에 그 이력으로 한자리 해볼까 하고 다닌다면 이판중의 사판이고, 절 주지를 살아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청정하게 산다면 그 스님이야말로 사판중의 이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 처해있을 지라도 처음 먹은 그 청정한 마음이 변치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행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수행자다.
도일(道一) 스님은 수십 년 동안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에 귀를 기울이며 외길만을 걸어온 학승(學僧)이다. 스님은 경전을 독송하거나 공부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스님은 1970년대, 십대 후반 나이로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경전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무조건 열심히 했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같은 것은 그 의미와 내용을 모두 외워버렸다.
그런 모습을 강주(講主)스님이나 중강(中講) 스님들이 잘 보았는지, 어느 날 스님에게 행자들을 가르치는 소임이 주어졌다. 그런데 행자들이 모인 방에 가 보니 모두 스님보다 나이가 많았다. 도일 스님의 은사스님 나이와 같은 노행자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행자의 아들이 스님과 동갑이었다.
그런 나이 많은 행자들 앞에서 강의를 하자 떨렸다. 스님은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다.
그러다가 스님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중강이 되고 새로 들어온 스님들을 가르치는 소임을 맡았다.
이렇게 법주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불국사에 가서 운기(雲起) 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을 사사(師事)받게 된다. 그러면서 불국사 강원의 역사도 새로 시작되었다.
스님은 그곳에서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중강 소임도 같이 보게 되었다.
그 후 스님은 오래된 고문서들을 번역하는 곳인 국역연수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불교경전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중국문화와 한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실력을 검증하는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스님도 응시했다.
얼마 후 스님은 합격 유무를 알기 위해 고사장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다며 길거리에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간신히 발표장에 가보니,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게 아닌가. 모두 피난하기 위해 시험의 합격 유무에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전쟁보다도 합격 유무가 더 중요했는지, 끝까지 가서 합격한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북한의 이웅평인가 하는 사람이 전투기를 몰고 와 투항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전쟁이 일어났다고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렇게 5년 동안 국역연수원 생활을 하며 공부를 했지만, 스님은 공부에 더 갈증을 느꼈다. 학문은 하면 할수록 어려웠다. 특히 한문은 고문(古文)과 현대의 언어인 백화문(白話文)이 쓰이면서 더욱 알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스님은 대만 유학을 결심한다. 스님은 대만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맞지 않는 기후 풍토와 생활비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는 도움을 받게 된다.
대만에서는 스님들의 음식이 철저하게 지켜져서 아예 스님들 전용 채식 식당이 있다. 도일 스님도 대만 풍습에 따라 채식 식당에서 매일 식사를 해결했다.
그러나 채식 식당은 일반 식당에 비해 가격이 더 비쌌다. 가지고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고 그렇다고 채식 식당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식당 주인이 와서, 앞으로는 어떤 신도가 식사비를 모두 내기로 했으니 무료로 먹으라고 하였다. 그 대만 신도가 스님의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갈 무렵이 되었다. 그래도 갈 때는 감사 인사를 해야겠기에 식사를 보시한 사람을 만나려고 했으나, 그 보시자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무 조건이 없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한 것이다.
그렇게 2년여의 대만 유학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수십 년전 출가한 법주사 강원에서 강주(講主)소임을 맡게 된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처음 경전을 공부하면서 생각했던 강주스님에 대한 존경, 학문에 대한 사랑의 결실이 이루어 진 것 같아 감개가 무량하다고 회고했다.
스님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을 어떤 때는 불교TV에 나가서 설(說)하기도 하고, 신도들 앞에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포교 전선에 서 있다.
나는 스님의 학문 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도일 스님의 학문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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