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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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고맙다’는 말밖에 남질 않네요."
네팔인 뿐씨가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이란주 대표에게 띄우는 편지
외국인노동자 인권운동 10년 맞은 이란주 선생님에게
-네팔인 두르바 구마르 뿐씨가 띄우는 편지



To 이란주 선생님께

아무리 생각해도 제 머릿속에는 ‘고맙다’는 말밖에 남질 않네요. 이 선생님은 늘 ‘괜찮다’ 했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내뱉을 수밖에 없는 말이네요.
외국인이주노동자 인권운동 10년.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는 그간 외국인이주노동자 문제에 무관심한 한국사회에 대한 분노로 절여살았다고 한다. 사진=김철우 기자
2001년 겨울에도 그랬었죠. 인천공항 출입국사무소 보호실에 갇혀있던 저를 면회 왔을 때도, 저는 ‘고맙다’는 말만 했었죠. 그리고 제가 물었죠. 아내와 딸아이는 잘 있느냐고.

1992년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힘든 노동을 하던 전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죠. 나름대로 행복한 일상을 꾸렸고, 97년에는 딸아이 현정이도 낳았죠. 혼인신고도 하고 합법적인 체류자격도 얻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꿋꿋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정신분열증을 앓기 시작하면서 꿈이 깨치기 시작했죠. 현정이도 지독한 피부병에 걸려 온몸이 늙은 오이껍데기처럼 변해갔어요. 설상가상으로 죽도록 일해서 돈을 벌어도 아내와 딸의 병원비를 내고 나면 끼니를 때울 돈이 없어 쩔쩔매야 했죠.

그래도 살만은 했어요. 소중한 가족이 곁에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내의 정신분열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요. 먹으라고 내미는 약을 자기 죽이는 약이라고 팽개쳤죠. 그러다 아내가 “내 남편이 불법체류자인데 나를 죽인다. 내 남편 잡아가라”며 파출소로 달려가는 바람에 전 졸지에 아내를 폭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출입국사무소로 넘겨졌죠.

선생님도 기막혀했죠. 높은 병원비를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1998년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을 찾았을 때, 선생님은 ‘주민세를 내야 하는지, 국적취득하면 부인의 의료보험 적용이 되는지, 분실한 외국인등록증의 재발급이 되는지’ 등 이것저것 챙겨주며 힘이 돼줬는데….

아무튼 그때 선생님은 저희 가족을 위해 정말 백방으로 뛰어다니셨지요. 노동부와 법무부에 사면요청 탄원서를 넣어주고, 오갈 데 없는 제 딸을 선생님 집으로 데려가 석 달간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셨죠. 뒤에 딸아이에게 들은 얘기인데, 선생님 댁 소파를 칼로 찢어놓은 녀석이 “바로 자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현정이 동갑내기인 아드님 무선이만 나무랐다죠.

웃는 얼굴이 천상 가수 노영심을 닮았다. 정작 이란주 대표는 손사래를 쳤지만. 사진=김철우 기자
선생님! 그 때 생각나세요? 가까스로 출입국사무소로부터 ‘일시보호해제’를 받고 화성외국인보호소 담장을 털털 걸어 나오던 초겨울을요. 그해 여름, 런닝 바람에 잡혀간 채 그대로 보호소를 나오던 절 붙잡고, 선생님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었죠. 그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었어요. “미안해요, 뿐씨. 아무 힘도 돼줄 수 없는 무기력한 제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라고요.

선생님은 늘 말했어요. 외국인이주노동자 문제에 무관심한 한국사회를 대신해 ‘미안하다’고. 그리고 ‘외국인도 한국인도 똑 같은 사람이니, 서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항상 외국인노동자 친구들에게 강조했죠.

네팔 동포 찬드라 누님 때도 그랬어요. 선생님은 찬드라 누님이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행려병자로 처리돼 자신의 이름을 잃어 버리고 6년 4개월간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한국 사람들에게 고발할 때, 이렇게 말했어요. “서글픈 그 이름, ‘찬드라’를 한국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고 몇 번이고 말했죠.

그러면서 선생님은 찬드라 누님에게 엄청난 가르침을 받았다고 제게 말했어요. 정신병원에서 나와 네팔로 돌아가기 전, “한국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미우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경찰은 미워! 다른 사람들은 아냐!”란 찬드라 누닙의 대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요.

태국 친구 노이의 사촌동생이 프레스에 오른손을 찍혀 몽땅 잘리는 사고를 당했을 때도 선생님은 자기 일처럼 동분서주했었지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장에게 보상금을 받기 위해 선생님은 함께 일하는 사람이 다섯 사람이 되면,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노이 사촌동생의 동료를 찾아 헤맸죠. 그 때, 노이 사촌동생이 “잃어버린 손을 되찾을 것 같아요”라고 선생님께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해요.

방학 기간을 맞아 아시아인권문화연대를 찾은 지역 청소년들에게 외국인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란주 대표. 사진=김철우 기자
그렇게 선생님은 외국인이주노동자들과 10년을 함께 해왔어요. 제가 네팔에서 한국으로 온 지도 벌써 14년을 맞고 있으니, 제 청춘이나 선생님의 젊음은 결국 하나였네요. 허물없는 친구로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해온 시간이니까요. 제가 한국에 와서 처음 배운 단어가 욕이었다는 얘기,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한국말을 못해 물건 사기가 겁났던 얘기들을 이제는 웃으면서 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선생님, 그리고 매번 사무실 탁자 밑이나 책장에 몰래 꽂아 놓은 돈을 앞으로는 뿌리치지 마세요. 이제는 집에 가서 “돈 잘 받았느냐”는 전화 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부터는 선생님께 드리고 온 돈을 다시 모아 제게 돌려주지 마세요. 정작 월급 받지 않고 자원봉사로 활동하는 선생님한테 돈이 더 필요하잖아요.

밤이 늦었네요. 방학 숙제를 하던 현정이가 금세 골아 떨어졌고, 아내도 일치감치 약 챙겨먹고 초저녁부터 자고 있네요. 선생님도 좋은 밤이 되기를 바래요.

From 현정이 아빠, 두르바 구마르 뿐


■ 이란주 대표와 뿐씨를 인터뷰한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취재후기】‘외국인이주노동자의 대모’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


8월 1일, 부천에 자리 잡은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찾는 데만 족히 1시간 넘게 걸렸다.
문패 없는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사무실 입구 복도벽에 붙은 A4용지의 안내표가 인상적이다. 사진=김철우 기자
약도도 위치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어렵게 찾은 사무실에는 그 흔한 문패 하나 없었다. 복도에는 A4용지에 ‘아시아인권문화연대☜’라 적힌 안내문이 전부였다. 순간, 출입국사무소 직원과 외국인이주노동자간 쫓고 쫓기는 어두운 현실이 기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어렵게 만난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이란주 대표. 외국인이주노동자와 함께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등에서 10년 넘게 상담 및 권리구제 활동, 의료지원, 연수생 제도 폐지 운동, 산재ㆍ의보 적용 등의 활동해온 이 대표는 수줍은 얼굴을 내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어요. 물을 게 뭐 있다고 여기까지….” 곧장 “왜 외국인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을 하느냐”고 이 대표에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구경꾼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맞으면 아프고, 슬프면 눈물이 나는 사람인데 말이에요.”

사무실에는 방학을 맞은 이 대표의 아들 무선이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보채고 있었다. 바닷가로 놀려가자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대표는 애써 무선이의 눈을 피했다. 오후에 외국인노동자와 상담약속이 잡혀있었기 때문이었다. (011)331-7145
부천=김철우 기자 |
2005-08-02 오후 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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