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조선시대 ⑭
병자호란으로 왕실과 국가의 위신이 추락하고 청(淸) 나라의 요구가 많아졌다.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이 증가하고 민중의 백성의 생활은 곤궁했다. 차도 마찬가지로 매년 천 포 씩 요구하니 다농(茶農)들의 부담이 커져 감당키 어렵게 되자 국가에서 다세 천포를 탕감해 주기도 했다.
궁중에서 쓰이는 차의 양을 줄여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지만 의례에는 차가 빠지지 않았다. 저간의 여러 난리 중에 차를 구하지 못했을 때는 대용차나 물로 대신하기도 했고, 인삼탕을 쓰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차가 국가적인 중요한 산물이라는 인식이 높아져 다마사를 지방으로 보내 독려하고 외국에도 많인 수출했다. 계속해서 명망있는 차인들이 나와 차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했다.
일본은 바야흐로 차의 유파가 많이 생겨 백가쟁명(百家爭鳴)식으로 이어지기 시작해싿. 차의 생산지는 확대되고, 생산기술도 향상했으며 차겨루기(鬪茶)가 성행했다.
① 홍만선(1643~1715): 실학자로 당쟁에 휩쓸리지 않는 차인이었다. 그는 <산림경제(山林經濟)> 2권에서 ‘다탕법(茶湯法)’을 썼다.
② 이상일(1612~1666): 청에 다녀와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왔다. 다시 ‘옥전다중(玉田茶中)’을 남겼다.
③ 임조 27년 간원(諫員)이 고하기를 하마연 때 사신 접대 칙사가 세자께 바친 찻종(茶鐘)을 물러내 오는데, 사옹원제조 이신원이 빼앗아 마셨으니 이는 불경스럽다. 그러니 문초해 죄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인조실록>
④ 남용익(1628~1692): 이조판서를 지낸 문인으로, <부상록(扶桑綠)>을 썼는데, 다옥을 지나며 천지차 다공(茶貢)을 받은 얘기가 있다.
⑤ 민정중(1628~1692): 호남어사로 갔을 때 차를 재배하지 않는 곳의 찻세를 재배지역으로 전환시켰다.
⑥ 풍가빈이 지은 나개차에 관한 글로 여러 항목으로 된 천여자의 글이다.
⑦ 등자모가 쓴 두 권의 다서로, 술과 차의 장단점을 논쟁하는 내용과 시문(詩文)을 엮었다.
⑧ 동소완(1624~1651): 명나라 말기의 명기(名妓). 뒷날 양이 소완을 기린 글에서 “그는 나와 함께 차를 즐겨 끓일 때 월혼운백(月魂雲魄)을 담은 듯 정치하게 했고, 화조월석(花朝月夕)에 차를 대하면 육우와 노동의 아취에 젖었다”고 했다.
주이존(1629~1709): 청대 학자로 평생 차를 즐겼다.
오임신(?~1689): 청대 학자로 <십국춘추>안에 ‘십국차사(十國茶史)’를 썼다.
진감: 육우의 <다경>을 보충하는 <호구다경주보(虎丘茶經註補)>를 썼다.
⑨ 담천이 당시 다세의 양을 자세히 적어 놓은 책이다.
⑩ 손동원: 차를 좋아해 <영가문견록(永嘉聞見錄)> 하권에 차의 즐거움을 기록했다.
⑪ 조장백: <속다경(續茶經)>에 다사를 썼다고 전한다.
⑫ 소굴원주(1579~1647): 무장이자 차인. 풍신수길과 덕천가량을 거쳐 가광(家光)까지 섬겼으며 대덕사의 일망, 망부, 팔창석 등의 다실을 만들었다. 다기 감정에 일가를 이루었고 ‘원주류’의 시조가 된다.
⑬ 천종단(1578~1658): 리휴의 손자로 삼천가(三千家)의 시조다. 리휴와 소암(小庵)의 지도로 차를 익히고 화가(和歌)와 비파에 능했으며 다도정신이 투철했다.
<한국>
조선시대
1641 궁가의 어염ㆍ각세 폐단 혁파
1643 홍만선(洪萬選) ①
@ 이일상(李一相)의 활동 ②
1645 소현세자의 죽음
1647 세폐(稅幣)에 차 천포를 면제
김해에 수로왕릉비 건립
1649 찻종에 차를 마시다 ③
1650 화엄사를 선종대가람으로 선정
1653 중국이 우리 사신에게 차를 공급
다시(茶時) 시행
1655 남용익(南龍翼) ④
1658 민정중(閔鼎重) ⑤
<중국>
청대
1642 <개차전(价茶牋)> ⑥
1643 <다주쟁기(茶酒爭寄)> ⑦
1644 이자성의 북경함락
1645 ‘섬사다마사례’ 제정
@ 동소완(董小宛) 주이존(朱彝尊) 오임신(吳任臣) 진감(陳鑒) ⑧
@ <초림잡조> ⑨
@ 손동원(孫同元) ⑩
1655 호구다경주보
@ 조장백(趙長白) ⑪
1660 영국 차 수입 시작
<일본>
강호시대
@ 차 재배지 장려(진화야)
@ 세천삼제, 소굴원주(小堀遠州)의 죽음 ⑫
@ 차겨루기 성행
@ 장다집이 생김
1658 종단(宗旦)의 죽음 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