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에 대해서
질문: 운전을 하고 가다보면 닭이나 돼지가 트럭에 실려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을 지극하게 낸다고는 하지만 꼭 우리가 이렇듯 낮은 차원의 동식물의 목숨을 끊어서 남의 살을 뜯어먹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 않은 듯 즐겁게 내 몸을 위해서 그것들을 취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요즘은 저의 눈에 도로에서 깔려 죽은 개나 고양이의 모습을 봅니다. 그럴 때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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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내 몸과 같고 내 생명과 같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하고 죽이지 말아야 하지만은 내 생명과 같고 내 몸과 같이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또 먹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먹는 이치가 어부가 고기들을 잡을 때 모든 것을 잡아다가 이 세상에 내 놓고 전부 죽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억겁을 거쳐서 우리가 진화되고 창조되고 이러한 문제가 없다면 그것은 전부 살생이지만은 만약에 고기들을 어부들이 그렇게 잡지 않는다면 그 고기 모습으로서의 한백년 살아야 하니, 또 잡아줘야 그 모습을 벗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먹어야 할 사람은 먹어야 하지만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먹지 마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주상보시며, 이쪽은 살생이 되고, 이쪽은 무주상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차이입니까. 이게.
그러니 사랑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먹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얼마나 귀중한 말입니까.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서 한줌 줘서 돈을 한주먹 준다 하더라도 쌀을 사 준다 하더라도 그건 임시방편입니다. 우리는 무주상보시를 해야 한생각을 해 줄 수 있는 그 능력으로서의 무주상보시를 해야 만이 그 거쳐 오면서 억겁을 거쳐 오면서 참 진화돼서 굴러올 때 업을 짓고, 유전을 짓고, 그 끄달리고 얽히고설킨 그 업보를 다 면제시켜줄 수 있는 그런 한생각을 내 줄 수 있다면, 썩은 뿌리를 그래서 없애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대로 퇴장해서 창살 없는 감옥인데 창살이 그 아예 자기 마음 가운데 창살이 없으니 그냥 활발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살생하지 마라, 그것은 두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마라’ 가 아니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닌 도리를 알아야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살생을 아무리 안한다고 하더라도 살생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항상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죠? 소를 한 마리를 다 먹는다 하더래도 그거는 먹는 사이가 없이 먹어야 양면이 다 산다, 이겁니다. 왜냐? 하다못해 부모를 위하든지 자식을 위해서 어떠한 걸 죽인다 하더라도 그 무명을 벗겨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그 도리를 알아야 됩니다. 그 무명을 벗겨주고 인간으로서 화현을 하게끔 하고 무명을 묶여있던 거를 벗겨준다 이겁니다. 벗겨주면 그 살은 약이 되니까 양면이 다 살 수 있는 겁니다. 이게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기가 고기로 보여서 못 먹는 사람은 못 먹고 고기가 고기로 보이지 않고 내 살과 같이 보인다면 바로 그것은 무명이 벗겨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 체는 약이 되지만 마음은 그 영혼은 바로 내 마음에다가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 체가 없는 거니까. 거기다 넣고 굴리면 모든 게 금방 ‘나’ 가 됩니다, 금방. 금방 한 찰나에 ‘나’ 가 됩니다. 닭이나 돼지나 개나 뭐, 모든 생명이 말입니다. 내가 살생을 꼭 해서만이 살생이 아니라 지나가다가 죽는 거를 봐도 그것은 반드시 건져야 합니다. 지나가는 벌레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생각에 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누리가 없어요. 모든 마음이 한마음으로 뭉치면 부러지지 않습니다. 좋은 마음과 좋은 행동과 좋은 건짐이라는 것은 세세생생에 버릴 것이 없고 아까울 것이 없고. 또 그렇게 되면서도 아니 버릴 게 없듯이 전부 때에 따라서 한 찰나에 도움이 오고, 거저가 없습니다. 내가 했으면 한대로입니다.
옛날에도 내가 그런 얘기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그거를 모든 여러 생명들의 그 모습들이 다르다 이러지마는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착하면 서로다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건. 길에 지나가는데 어느 부자 대갓집에서 그 집을 헐어 헐어서 인제 고치려고 하는데 큰 구렁이가 나왔어요, 그 집에서. 근데 그 집의 젊은이들이 모르니까 그걸 그냥 토막토막 그냥 내서 저 길바닥에다 그냥 내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토막토막 낸 것이 그냥 펄떡펄떡 뛰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지나가다가 목견해서 보고 참 안됐어요. 어쩌면 그렇게 그 마음이 안됐는지 그냥 모르겠어요. 그래서 헌 통을 집어 가지곤 집게로다가 집어서 넣어 가지곤 저 모래톱에다가 묻어 줬습니다. 흙에다가. 밤동산이라고 하는 곳에 묻어 줬거든요. 묻어주고 기왓장을 이렇게 덮어 놨습니다. 비가 맞으면 썩을까봐. 그래서 이렇게 했는데, 얼마 있다가 거길 지나가다가 또 그것을 이렇게 보고 헤쳐 보니까 간 곳이 없어요. 그게 썩었으면 거기에 구더기가 나야 할 텐데 간 곳이 없단 말입니다, 아예. 그대로 그냥 해놓은 거 그대로 있는데 그거를 묻어놓은 게 구렁이가 한데 합치면 한 깡통이나 되는데 그게 가뭇도 없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 이렇게 그 나는 저녁이면은 인제 다 누구든지 자면은 풀섶이든 어디든 내가 앉아있고 싶은데 그냥 앉아서 30분, 그거는 30분이다 한 시간이다 이런 게 없습니다. 내가 앉아있고 싶으면 별을 쳐다보고 나 보고 이러면서 그 재미있는 거는 말도 못해요. 그 정말이지 그 저녁이 돌아오면 그렇게 조용하고 그렇게 내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 별성이 하나하나가 나아님이 없고 그 저 풀 한 포기가 하나하나가 나아님이 없으니 그 벗들하고 노느라고 아주 정신이 팔렸죠. 그랬는데 그렇게 잠시 이렇게 앉아서 참 저녁이 돼서 별이 뜨고 그래서 좋아서 쳐다보고 그러는데, 쳐다보니까 그 구렁이가 말입니다, 공중으로 그 저, 이 저, 광목 있죠? 하얀 광목. 그것이 그냥 파르르르 날더니 그걸 타고선 그냥 올라가는 겁니다, 그걸 타고. 그러더니 그것이 저- 꼭대기로 올라가더니마는 탁 보이는데 부처님 상이 그냥 그냥 보이는 겁니다, 그게 화해서. 그 마음이 화하면 몸은 벗어지고 그 마음이 화하면 마음이 바로 사람도 될 수 있고 부처로서의 한마음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게 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벌써 그것은 벌써 내가 그걸 거기다가 묻어줄 때 벌써 나로 변했고 내가 변해서 벌써 글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니 그 뱀도 모두가 언짢을 때는 도와줍니다. 어떻게 어디 가서 어떻게 됐든지 그 용도에 따라서 어려움의 용도에 따라서 모두 그냥 도와주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시골에 댕기면서 많은 소에 친 사람 뱀에 물린 사람, 이런 사람들도 극히 한 생각만 하면 그 병이 나았단 말입니다.
그건 왜냐? 모두 그 용도에 따라서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궁무진 합니까? 그러니 한마음이 뭉쳐지지 않는다면 그 능력이 발휘할 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러니 우리 내면세계에 우리 몸뚱이 속에 그 천차만별로 들은 그 이름들이 다, 의식들이 그 생명들이 다 나 아님이 없다는 얘기죠. 그럼으로써 그걸 한데 합쳐서 부르는 게 바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 속에 그렇게 자기 사람이 많은데 말입니다. 그 이름이 어떤 걸 불를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위장에 있는 그 모습들이 나라고 하겠습니까? 또는 간장에 있는 생명들이 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내 생명이 그렇게 많고 내 모습이 그렇게 많고 내 마음이 그렇게 천차만별로 자꾸 화해서 자꾸 나투고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끊는 것도 없고 안 끊는 것도 없느니라. 색과 공은 그냥 그대로 둘이 아니어서 바로 여러분들이 움죽거리는 대로 그 공해서 돌아가니까 둘이 아니란 뜻이죠. 그것은 정녕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죄를 짓지 마시고 함이 없는 무주상 보시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살아가세요.
부처님 서 말 서 되의 사리
질문: 석가모니 부처님도 6년 동안 산에 앉아 좌선을 통하여 열반을 성취하셔서 임종시에 서 말 서 되의 사리가 나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답변: 근데 그 6년 동안을 좌선만 한 게 아니고요, 즉 말하자면 마음이 좌선을 한 거지요. 그러니 6년 동안 가만히 요렇게 앉아서 저 덩어리가 된 줄 아세요? 그러면 부딪침이 없어서, 새가 쪼고 그러는 것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걸 알았으니깐 공부를 했죠. 거기에 끄달리질 않고. 만약에 그걸 몰랐으면 송장이게요? 알면서도 송장 노릇을 한 거예요, 얼른 쉽게 말해서. 그래서 살아 있을 때에 열반이지 죽은 게 열반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그러니깐 그 부처님께서는 자기를 발견해 가지고, 스스로 발견을 해 가지고 보니까 모두 그냥 귀신단지 뭐 할 거 없이 여기서 그냥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거든, 이 속에서. ‘아하! 요놈들이 그랬구나!’ 이럭하고선 거기에서 ‘어! 다 네놈들이 그런 거니까 내가 상관할 게 뭐 있나?’ 그러곤 그냥 다 그냥, 그러니까 속지 않은 거죠. ‘거기서 나왔구나. 내가 어떡하나 볼 양으로 그렇게 자꾸 나오는구나.’ 하고 아주 그것도 물리쳤지 않습니까? 그게 둘이 아니게 놓으니까 물리친 거죠. 그러니까 하나도 버리질 않았어요. 그냥 마구니든 귀신이든 뭐 미녀든 그냥, 뭐든지 버리질 않고 거기다가 그냥 뭉쳐 놓아 버린 거예요. 그건 체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뭉쳐 놓으니까 그게 어떻게 됐느냐면 ‘아, 이래도 속지 않는구나. 할 수 없지, 뭐. 속지 않으니, 뭐. 인젠 다 알고 있는 거 자꾸 저거 해 봤자야 재미도 없고.’ 그러니깐 고만 물러선 거죠. 그러니까 물리쳤다 이러는 거죠. 그래서 하나도 갖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버릴 게 없더라 하는 게 나오죠. 그러니까 항복을, 안에서도 항복을 받았거니와 바깥에서도 항복을 받았다. 그러니까 모든 걸 항복을 받고 난 것이 뭉쳐서 자기 아님이 없는 도리로서 화한 거죠, 자비로.
그러니까 그거는 인제 이렇게 말하는 거죠. 큰스님이 돌아가거나 작은 스님이 돌아가거나 열반했다고 인제 이렇게, 누가 몰상식하게 죽었다고 합니까? 죽은 게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보세요. ‘이 세상에 온 게 없으니 갈 것도 없느니라.’ 이 뜻이 뭐냐? 여러분의 그 생명의 근원은 과거의 근원 여러분의 마음이나 지금 현실에 다시 태어나서의 마음이나 똑 같아요, 불성은. 그 생명 자체는.
그래서 만공 스님은 쪼끄만 애들더러 ‘날 좀 때려라.’ 그래 놓고는 ‘돈을 줄게, 때려라.’ 이래 놓곤, 막 때리니까 ‘난 안 맞았다, 안 맞았다.’ 이랬거든요. 고것이 남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한 거지 자기가 하고 싶어 한 게 아니에요. 그게 장난 같지만. 그러니깐 이 몸뚱이가 맞은 거지 자기가 맞은 게 아니에요. 죽었어도 자긴 죽은 게 없고 살았어도 산 게 없다는 그 언어가 붙지 않는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열반이죠. 그러니까 누가 깨쳤든 안 깨쳤든 열반하셨다고, 즉 말하자면 예의를 갖추는 거죠. 깨달았든 안 깨달았든 예의를 갖추는 겁니다, 그게 그러니깐.
그리고 그 사리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석존이 열반하셨을 때 서 말 서 되가 나왔고 뭐 어쩌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게 전부 몸뚱이도 응신이기 때문에, 몸뚱이도 응신이거든요. 하나 버릴 게 없는 응신이고 화신이고 모두 법신이고, 이건 부처고 이러니까 하나도 버릴 게 없이 그냥 그대로 사그라진 채로 그대로 사리다 이겁니다. 털끝 하나 사리 아닌 게 없어요. 이걸 이렇게 따진 거지. 아니, 그러니까 이 그 세포 하나하나마다 전부 사리죠. 그러니까 그 몸뚱이 털끝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사리다 이겁니다. 그 뜻은 이 세상의 모두가 자기 아님이 없다는 얘기죠. 그러니 죽은 것도 없고, 즉 말하자면은 사리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서 말 서 되라는 말도 그것도 아주 그냥 서 말 서 되라고 한 고 액수 액면 고대로 있는 게 아니고 전체를 말한 겁니다.
그러면 부처님 몸뚱이뿐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의, ‘삼천’ 하면 삼이 들어가죠? 서 말이란 말입니다. 이거를 서 말을 한 말로 따진다면 ‘천’ 이렇게 ‘모은 한마음’ 하는 거나 똑같은 얘기죠. 천이거든. ‘천 지’ 이렇게 해도 ‘천’ 은 이게 천지가 전부 이 우주 전체가 하나거든. 하나로 돌아가거든. 그게 하나로 돌아가는 게 ‘지’ 해놓으면 그냥 또 한데 합쳐져 버려요. 위 아래로 합치는 것이 천지요, 또 돌아서 천은 그냥 한데 합쳐서 둥글게 돌아가는 게 천이란 말입니다. ‘삼천’ 그래서.
그러니 모두가, 이 천지가 전부 사리 아닌 게 없으니 부처님 아닌 게 없고, 부처님 아닌 게 없으니 부처님 도량 아닌 게 없고, 부처님 도량 아닌 게 없으니 전부 그 모두 사람이 전부 부처 아닌 게 없느니라. 그 가운데에 마음을 한 찰나 이렇게, 백지장 하나 사이 이렇게 넘어서면, 저 언덕을 넘어서면 부처고 법신이고 화신이지만, 그것도 또 말을 하자면 가만히 있으면 부와 하나가 되고, 부처가 되고, 또 이게 생각을 냈다 하면 그냥 법신으로 그냥 이렇게 화해 버려요, 하나로.
그래서 그렇게 되니까는 전부 이게 부처님 그 말씀 아닌 게 없고 버릴 게 없고 천칠백 공안이 아닌 게 없고 돌 하나도 화두 아닌 게 없고 또 공안 아닌 게 없죠. 그러니까 부처님이 도량 아닌 게 없는 그 반면에 부처님 그 자체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 보니까 ‘야! 그렇구나. 뱀이나 개구리나 소나 이런 거를 건지려면 부처님의 그 마음이 거기에 들지 않고는 그 무명을 벗길 수가 없구나.’ 그 마음은 부처님 마음과 합일해서 하나로 뭉쳐서 놓고 돌리고서는, 그러니까 벌써 용탕을 해 먹은 거죠. 부처님은 그렇게 용탕을 수시로 해 잡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해놓고는 무명만 딱 그냥 벗은 겁니다.
그러니까 무명이 바꿔지는 거죠. 금방 사람이 돼 버렸어. 그러니까 그 몸뚱이는 그냥 무명이 벗겨진 거고. 그러니깐 뱀의, 즉 말하자면 습이 많이 남았었는데 부처님의 마음이 확 열어 주니까 거기다 넣고는 체인지가 돼버리니까 그냥, 그게 좋은 음식과 같이 나쁜 음식이 좋은 음식으로 그냥 화해 버렸죠. 체가 없는 거니깐 화해질 수 있다 이거죠. 체가 있는 거면 그냥 뭐 잘못된 거를 잘되게 어떻게 그 물건을 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무궁무진하죠.
자식문제만은 되지 않는데…
질문: 미국 엘에이에 사는 재미교포 입니다. 한국에서 우연히 불심이 깊으신 분에게서 한마음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주신 한마음 요전을 소중히 미국 올 때 가져왔습니다. 한마음요전을 처음 읽고나서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평소에 제가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불법 그 모든 것이 한마음 요전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마음 요전을 10번도 더 읽었습니다. 대행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겨 스님께 질문을 드리고자 글을 오립니다. 현 생활에서 항상 주인공만 믿는 생활을 하고 있는 중 바라고 원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해결되는 신비로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식에 관한 일만은 아무리 간절히 주인공에게 맡겨 봐도 해결되지가 않습니다. 왜 그런지 꼭 스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답해 주실 수 있는지요?
답변: 여러분들이 도리를 지금 배우는 것이 마음의 도리를 지금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 배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재산을 가져오라는 것도 아니요, 여러분들이 이 마음공부를 여러분들이 해서 여러분들의 이익을 보자는 거지, 여러분들의 깨달음을 가져오라는 것이고, 여러분들의 몸을 보존하라는 것이고 가정을 보전하라는 것이고 이끌어가고 자식들을, 위로는 부모 묵은 빚을 갚고 햇빛을 은혜를 갚고 자식들의, 내가 능력을 길러야 자식들한테도 능력의 그 빛이 거기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능력을 기르지 않고 자식들도 뿌리가 깊게 박히고 건전하고 건실하게 뿌리가 자랄 수가 없습니다. 왜 그 혈통이요 그 핏줄이라고 그러죠? 어머니 아버지의 그 혈통과 그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을 닦으면 그 마음이 이 모든 혈통, 혈통과 피 전체가 전부 바꿔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그 모든 인연에 따라서 뭉쳐진 업이, 업 덩어립니다, 이 모든 생명의 의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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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둘째는 다스려 가면서 여기다가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맡겨 놔야 됩니다. 왜냐하면 악업ㆍ선업을 다 지닌 인과로서 이렇게 뭉쳐진 이 참, 개수로 따질 수가 없이 많은 그 의식들이 여기에 지금 수효가 그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러면 헤아릴 수 없는 그 모습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모습들이 그렇게 많고. 그런데 그 모습과 의식, 생명 그것들이 모두 많은 생명들이 내가 마음먹는 대로 따라갑니다, 이게. 그러기 때문에 어디가 탁! 엊그저께도 그랬지만 남뿐이 아니라, 다리가 아파서 내가 걷지 못한다 이럴 때 “야! 너희들 너 한마음 그 주인공 심부름을 하는데, 한마음 주인공 심부름을 하는데 아니, 이 다리가 이렇게 아파서 어떡하니?” 이렇게 생각을 하구선 탁 참 아주 그게 진실하고 아주 근면하고 건실한 생각이죠. 그렇게 하면 벌써 이 속에서 알아듣습니다. 알아들어서 다리가 금방 괜찮아질 수가 있습니다. 다리뿐이 아닙니다. 어떠한 문제도 안 되는 게 없습니다.
이게 지금 여러분들이 우리 이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대 정법은 뭐냐? ‘실행’입니다. ‘실천과 실행’. 실천 실행을 하는데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말을 해서. 주인공! 모두 실험을 해 보세요. 내 가정에 어떠한 것이나 내 자식을 위한다든가 내 부모를 위한다든가 내 몸을 생각한대든가 뭐 어디 아프다든가 일이 안 된다든가 무슨 판, 재판이 걸렸다든가 어떠한 문제가 앞에 그거 언제 어느 때 닥칠지도 모르거든요. 여기는 또 차를 타고 댕기니까 그것도 위험하고 그러니까 모든 거는 거기에 맡겨 놓고 이렇게 한번 실험을 해 보고 실천을 해 보는 데에 아주 목적이 큰 것이 있습니다. 실천 없이는 그것은 자기가, 에- 어떻게 실천이 없고 자기가 체험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식구들한테도 나쁜 말 하지 말고 나쁜 생각하지 말고 잘못했다고 해서 “요놈의 새끼, 너 혼 좀 나봐라.” 이러기도 하고 “요놈의 새끼는 그냥 아유, 하는 거 보면 조거.” 이렇게 하고,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이겁니다. 한 식구도.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주인공에 맡기고 그저 한마음 주인공, 이게 아들도 남편도 어머니도 자식도 친척도 다 한마음 아니야? 가설이 돼 있으니까. 전부 한마음이라.
한마음 주인공만이 그 모두 몰라서 물리가 터지질 않아서 모두 그런 거니까 그저 물리가 터져서 영리하게 제가 자기 앞가림을 하고 나가게끔 이렇게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맡겨 놓고 잘되기를…, 하구선 잘못한 것은 인의롭게 잘…, “얘! 너 나가서 뭐, 뭐나 좀 먹었니?” 요렇게 부드럽게, 허허, 보금자리가 따뜻하게 해 주란 말이지. 그럼으로써 여기다 맡김으로써 그 마음은 흐뭇해지고 따뜻해지고 처음에는 냉랭하다가도 따뜻해지고 사랑이 깃드니 이탈되지 않고 그냥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쳐지니 화목이 오고, 화목이 오니 복이 오고 복이 오니 공덕이 온다 이겁니다. 응?
이 세상에 왜들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어떤 사람은 예전에 그랬어요. 그걸 아주 한탄을 하더군요. 그냥 어떻게 나가서 노름만 하고 아들이 그러는지 얼마나 미웠겠소. 벌이는 안 하고 그러니까는 얼마나 미웠으면 “이놈의 새끼 나가서 급살이나 맞어라.” “이 놈의 새끼 염병이나 걸려서 죽어라.” 이러고는 이제…. 예전에는 아마 그렇게 에- 그 욕을 지독하게 하는 분이 많이 있었죠. 그러곤 했는데 정말 염병이 걸려서 죽었거든. 그 아들하나 있는 게. 그것이 남의 탓을 해서 그렇다고. 그 아들 탓을 하는 거지. 자기가 그 업보를 그렇게 짓고 나온 그 업본데, 자기 업보 생각을 하지 아들 탓을 한 거야, 전부. 응. 그래서 하도 울고 있으니깐, 아 그 어느 때 절의 스님이 가시면서 그것을 극락세계로서 축원을 해 주시면서 그 어머니 더러 이렇게 말했거든. “보살님이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그렇게 해서 남의 돈을 그-렇게 그냥 다 없애고 남을 못살게 하고 계집까지 팔아먹고 하여튼 있는 것 없는 것 부모 속은 다 썩이고 당신이 예전에 그렇게 했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보라고. 그게 쟤가 바로 당신이라고. 그런데 누구 탓을 하느냐고. 그래서 하도 그러니까 인제는 그것마저 지닐, 당신이 업이 많아서 벌써 그 아들이 인제는 다 원수 갚았으니까 갔다 이거야. 갔는데 조금이래도 더 살고 인제 그게 다 업보가 지내면 아들이 인제 그럴, 그렇게 안 할 때가 돼 가는데 당신이 욕을 하도 해서 그게 그렇게 됐다 이거야. “그랬으니 당신이 죽이고서 당신이 왜 우느냐 이거지.” 그러구 하더랍니다.
그래서 훌렁 벗어 버리고 자식들도 속 안 썩이고 또 주위에도 그냥 그 미움 사지 않고, 구구하지 않고. 어떻게 이루 그걸 다 말을 하리까? 섭섭한 것도 많을 테고, 하하하…. 그러니까 훌렁 그냥 벗어버리고 다시 그려서 다시 미술을 그려서 다시 내가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그러란 말입니다. 응? 또, 다시 나오기 싫으면, 그렇게 해서 공부해서 나온 사람들이 그래도 장관 해 먹고 대통령 해먹고 다 해먹습디다. 부모가 또 그렇게 밀어서 참 정성을 지극히 해서 대통령하는 수도 많고.
그러니까 이 공부들 열심히 하십시오. 자기가 해 놓은 것은 누군가 뺏어갈 수도 없고 헛된 게 아닙니다. 그저 일을 허시다가도 헛되게 그냥 보내지 마시고 일하면서 생각하시는 거야 마음대로 아니겠습니까? 돈이 드니 걱정입니까? 아, 몸으로 일하면서 돈 벌면서 생각을 좀 허시라 이겁니다. 생각하는 것도 돈 내고 생각합니까? 또 시간이 걸립니까? 또 시간을 잡어먹습니까? 뭐 일하면서도 생각하랬는데.
귀신에 대해서
질문: 요즘 인터넷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고, 요즘이 무더운 여름이어서 그런지 귀신에 관한 영화나 연극들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 꿈에 보이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렇듯 보이지 않는 귀신의 존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가 더우면 피서간다 그렇게 하는데 그건 피서구요. 우리가 어떠한 일이 생기면 벌써 ‘아이구, 속상해’ 그러고 피하려고 합니다.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단호히 없애려고 하셔야 됩니다. 귀신이 백 명, 스무 명, 만 명이 온다 하더라도 그 귀신은 나이기 때문에 귀신이 두렵지 않다 이 소리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게 이해가 안 가실런지 모르지만 그 마음은 귀신이든 귀신이 아니든, 선이든지 악이든지, 부처든지 마구니든지 그 마음은 누구나가 불성은 똑같으면서 악하게 생각을 했다가도 다 준다면 아주 부처가 되는 겁니다. 누가 다 주는데 싫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다 주는 도리를 배우십시오. 모든 것을 갖는 도리를 배우지 마시고 주는 도리만 배운다면 철저하게 100% 준다면 100%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다고도 생각하지 마시고 하십시오. 그냥 무조건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다 버려야 내가 다 얻을 수 있고, 다 얻을 수 있어야 항복을 받을 수 있고, 항복을 받을 수 있어야 모두가 내 도량 아님이 없을 때 비로소 여러분들이 다 한 생각에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고 건질 수 있고, 내 나라를 건질 수 있고, 모든 지금 앞으로 자라나는 애들한테 모든 머리에 두뇌에, 즉 말하자면 물리가 터지게끔 해줄 수 있는 그런 여러분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죽은 사람을 보든지 귀신을 보든지 선신을 보든지 놀래지 말고 항상 둘이 아닌 걸로 알아야 합니다. 때에 따라서 그 닥쳐오는 그 날짜에 임박해가지고선 꿈이 꾸어진다든가, 어떠한 귀신이 나타난다 하더래도 둘로 보지 말라 이겁니다. 내 안에서 나를 테스트 해보려고 환생으로 내보내는 작용이다 하는 것만 알면 그 자리에다가 그대로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니깐 그 자리에다 도로 놔버린다면 바로 그냥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들 하는데 어떤 문제가 닥치더라도 “이건 시험이다, 테스트하는 시험이다.” 하고 그냥 거기다 놓으면 거기서 다 나오는 건데 어디 딴 데서 나와요?
그래서 가만히 보면 ‘네 의식 속에서 마음을 통해서 나오는 것에 속지마라, 그 나오는 것을 네 주인공에다 모두 일임을 해라’ 이런 걸 알아들으면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아요. 그러니까 딴 데서 온 줄 알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 의식 속에서 일어난 걸 아니고 말이야. 자기 속에서 나오는 건데 딴 데서 귀신이 온 줄 알고 그러는 거지, 그러고 귀신으로만 알아요. 그러니 상대가 되는데 문제가 안 생겨요? 이 마음, 이 육체 안에 마음 안에 그냥 영가가 그냥 셋도 들어가 있고 그냥 둘도 들어가 있고 그렇지. 그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요. 하나도 딴 데서 들어온 게 없이 ‘내 이 의식 속에서 나오는 거로구나’ 하고선 모든 걸 속지 말고 그냥 주인공에다 일임하고 ‘너만이 이 모두를 다스릴 수 있는 거 아니야’ 하곤 그냥 모두 거기다 맡겨놓으면 다 편안할 것을. 이해가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