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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재해석한 <혜초따라 5만리>
김규현 화백, 7월 23일 봉선사서 출판기념회

“혜초 스님은 처음 아랍 제국을 다녀온 동양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인입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아니 자전거조차 없던 서기 720년대의 먼 옛날에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인도로 가서 그 전역을 도보 순례한 혜초 스님은 정말 위대한 탐험가이자 수행자라고 생각합니다.”

김규현 티베트문화연구소장.
화가 김규현(58ㆍ티베트문화연구소장)씨가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나와있는 여정을 그대로 다시 순례하며 재해석한 <혜초따라 5만리>를 펴냈다.

<왕오천축국전>은 신라 승려 혜초(704~787)의 인도 기행문으로, 1908년 둔황석굴에 두루마리 형태로 축약본 일부가 남아있던 것을 프랑스의 탐험가 펠리오가 발견했다. 원본은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상태.

김 소장이 이번 책 출간을 위해 다닌 곳만도 12개국이 넘는다. 무려 10여년간 20여회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책도 순례여정에 맞게 로드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구성됐다. 특히 이 책은 각주마다 ‘가이드 포인트’ 코너를 두어 지은이가 순례한 여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순례 도전용 가이드북으로도 손색이 없다.


혜초 스님의 중앙아시아 행선도.


이 책 속에는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주장도 제기돼 눈길을 끌고 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순례중에 혜초 스님의 열반지가 건원보리사가 아닌 중국 오대산 금각사라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동안 혜초 스님이 <천발대교왕경>을 번역, 서문을 쓰고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 오대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는 금각사(金閣寺)의 별칭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마상축제.
김 소장은 이 책에서 “‘건원’이란 당나라 8대 황제인 숙종의 연호”라면서 “건원보리사는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건원황제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라는 상징적 보통명사”라고 덧붙였다. 또 “황제와 연관이 있는 사찰의 경우 중국에서는 이름대신 황제의 연호를 대신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1300년이 지난 순례지를 따라가며 지은이가 재해석한 흔적은 책 곳곳에서 살아 숨쉰다. 가령 인도의 라즈기르와 쿠시나가르 사이를 통과하려면 나란다대학을 거쳐야 하는데 혜초 스님은 이 대학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지은이는 혜초 스님이 나란다대학의 입학 시험에서 낙방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혜초 스님의 은사가 나란다대학 출신의 불공 삼장 스님인데 은사의 대학을 지나가면서 책 속에 이 대학을 한줄도 소개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에 나란다대학의 입학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 힘들다고 돼 있어 분명 스승의 영향을 받은 혜초 스님이 입학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져 소개하지 않았다고 재미있는 해석을 제기했다.

김 소장은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아프카니스탄 바미얀 석굴을 여행하다가 총ㅊ탄 세례를 받기도 했으며, 인도에서는 강도를 만나 소지품을 강탈당하기도 일쑤였다. 또 아프카니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비자문제 때문에 다시 3만리를 되돌아가 항공편으로 우즈베키스탄 순례를 하기도 했다.

이란과 아프간의 국경선.
“순례를 마친 뒤 책을 쓰면서 우리 민족의 빼어난 문화적 슬기를 많이 느꼈어요. 19살의 나이로 이국으로 떠난 혜초 스님은 4년 간 서역을 여행하면서 서정성 짙은 여행기를 남겼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은 민족의 숭문정신과 문화적 긍지를 그대로 담고 있어요”

성균관대학교와 해인불교 전문강원을 나와 북경중앙미술대에서 수인목판화를 전공했으며, 라싸의 티베트대학에서 만다라와 탕카를 연구했다. 저서로는 <티베트의 신비와 명상> <티베트 역사산책> <티베트의 사계> 등이 있으며 올 가을에는 티베트의 이상향을 주제로 한 <샴발라>를 출간할 계획이다. 또한 김 소장은 ‘왕오천축국전’과 관련된 로드다큐멘터리와 음반 제작에도 나설 예정이다.

한편 김 소장은 남양주 봉선사에서 7월 23일 <혜초따라 5만리 출판기념회>를 개최한다.


<혜초따라 5만리 상ㆍ하권>
김규현 지음
여시아문 펴냄/각권 1만8천원
김주일 기자 | jikim@buddhapia.com
2005-07-20 오후 3:17:00
 
한마디
모든 학설은 처음에는 ‘가설’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것은 강조하지 않아도 될 일반적인 상식이다. 혜초스님이 왕사성 길목에 있는 나란다대학을 지나가면서도(?) 나란다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학계에서는 명백한 대답을 내못치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이 글의 저자의 주장은 기발한 착상이지만, 본문을 차분히 읽어보면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런 면에서 누구나 자기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것이지만,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논리의 틀 안 에서만 남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인데, 위의 댓글의 시각은 평형성을 잃었기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된다. 밀교적 인물을 들추어내는 현학적 태 도는 그렇다하더라도, 마치 혜초는 밀교승이기에 위대하고 현장법사는 현교승이 기에 논할 가치가 없다는 식이라던가, 당대 천하제일의 학문의 요람인 나란다의 입학시험을 할 일없어서라는 식의 논리는 더욱 그러하다. 혜초스님의 위대함은 도전정신에 있는 것이지 밀교승이기에 위대한 것이 아니다.
(2005-07-29 오전 10:30:40)
58
혜초스님이 은사 불공삼장이 다니던 나란다 대학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이유가 이 대학 입학시험에서 낙방했기 때문이라고? 책 속에 이 대학을 한줄도 소개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나란다대학의 저명한 학승이었던 티로파는 이 불교대학을 박차고 승복을 벗어던지고 다키니의 안내를 받아 재가 구루이자 성취자 틸로파 문하에 들어가며, 깨달음을 얻었다. 샨티데바나, 아티샤같은 밀교의 대성취자들은 모두 날란다나 비크라마실라 대학(대사찰)을 뛰쳐나왔고, 또는 바다 멀리의 구루들을 만나 배움을 얻은 분들이다. 밀라레파와 그의 구루, 위대한 재가요기이자 탄트라 번역가, 마르파에 대해선 재론하지 않겠다. 밀교의 위대한 스승 금강지를 이미 만난 위대한 로차와 혜초스님이 (할 일이 없어?) 나란다대학의 입시를 치뤘다는 착상 자체가 현교학승 현장의 사고를 이어받은 잘못이고, 더더욱이 낙방이라는 추리는 망발의 극치다. 21세기의 편리한 투어리즘, 비행기와 자동차 배낭여행에 자주 오른다고, 금방 혜초스님 수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혜초스님을 훼손하지 말라.
(2005-07-21 오후 12:00:44)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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