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월, 한국무용계에는 대 이변이 일어났다. 14년간 장기집권한 조흥동씨의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새 무용협회 이사장에 김복희 한양대 무용과 교수(57)가 선출됐다. 그것도 더블 스코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무용계는 새 사령관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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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작품 기획과 협회의 행정일을 주로 하고 있지만, 김 교수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자신이 만든 작품에 직접 출연할 정도로 무용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영원한 현역’ 김 교수의 첫 무대는 1971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교수는 이화여대 1년 후배인 김화숙씨(현 원광대 교수)와 ‘김복희 ? 김화숙 무용단’을 창단한다. 그리고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첫 작품으로 ‘법열의 시’를 무대에 올렸다.
“자아 찾기 과정을 그린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이었죠. 목탁과 범종, 목어와 운판을 무대위로 동원했어요. 당시만 해도 종교적인 소재를 가지고 처음 시도된 현대무용 작품이라 “저게 무슨 현대무용이냐!”는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주위의 냉혹한 평가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김 교수는 ‘서양에 현대가 있으면 우리에게도 현대가 있다! 비록 서양적 형식을 빌어 왔더라도 우리나라 춤꾼은 한국적 정서를 담아야 한다. 현대 무용에서도 우리의 몸놀림을 찾아야 한다’ 며 계속 자신의 작품 세계에 불교적 정서를 끊임없이 주입했다. 이것은 불교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불교적 소재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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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35년동안 무대에 쏟아낸 60여편의 작품들 대부분이 불교와 무관하지 않다. ‘춘향이야기’에서는 절 마당에 고요히 서 있는 탑이 이야기하는 것을 몸짓 언어로 옮겼다. 또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을 이기지 못해 만든 ‘호곡’에서는 무대에 끊임없이 향을 피워댔다.
<화엄경>의 이야기를 춤으로 옮겨본 ‘흙으로 빚은 사리의 나들이’는 한 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정중동의 움직임을 현대적으로 잘 풀어냈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김 교수는 춤에 여러번 무용수들의 육성도 섞었다.
김 교수는 몸의 움직임만이 춤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소리까지도 넓은 의미의 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때론 그의 춤에는 인간의 울음과 절규도 등장한다. 원효대사 이야기를 그린 ‘요석, 신라의 외출’ 또한 수작으로 꼽히는 김 교수의 대표작이다. 원효 대사와 주인공 달래가 꿈속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고 이튿날 아침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또 ‘환’에서는 희미한 영고성쇠의 잔영속에 구음 살풀이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김 교수가 맨 앞에서 정중동의 춤사위를 흩날린다. 밖으로 퍼져나가는 동작대신 움직임을 안으로 다스린다.
이렇게 수많은 작품들이 대변해 주듯 김 교수의 춤은 인간의 연(緣)을 뿌리로 한 불교적 무용소설이다. 35년의 춤작업은 불교문학 작품 및 교리서를 춤무대로 고스란히 불러낸 만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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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동안 김 교수가 우리 무용계에서 이룬 기념비적인 작업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한국적인 현대춤 만들기, 남성 무용수 육성, 한국현대춤협회 발족(86년), 안무자의 작가정신을 강조한 ‘춤작가 12인전’ 창설(87), 무용인 최초로 체육대학장 부임 등. 현실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그의 도전은 결국 하나씩 실현됐다.
“모든 춤은 내 자신을 찾아가면서 타인과 만나 공동체를 이루는 공동선입니다. 따라서 관객 즉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조화되지 않으면 춤이 될 수 없으며, 시대상황에 따라 다르게 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좀 더 일찍 서양무용의 한계를 동양적 정서, 제 삶의 일부인 불교에서 찾으려 했던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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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흔들림 없는 꼿꼿한 자태에서 한국무용의 희망이 물씬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