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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오히려 중국내에서는 더 그렇다. 중국 모대학의 학력경시대회 문제중에 너무나 간단한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팔대산인은 한 사람인가, 아니면 여덟사람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대다수 학생이 답을 몰랐다고 한다. 그렇지만 중국 고대회화를 전공한 미국의 어느 전문가에게 중국 화가중 누구 그림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주저없이 “팔대산인의 그림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분명 그는 역대 중국 최고의 작가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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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팔대산인은 명나라 왕족이라는 특수 신분으로 나라가 망하는 거대한 변란으로 인해 미치기에 이르렀고, 결국 선(禪)과 그림은 그에게 일종의 도피처였다.
중국 문인화의 거두로 평가받는 팔대산인은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정작 남긴 글이 너무 적어 그의 삶은 대부분 ‘수수께끼’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인 화가 저우스펀이 지은 <팔대산인>은 비록 소설형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불운한 시대의 한 고독한 천재화가였던 팔대산인에 대해 궁금했던 이들에게 반가운 책이 될 것 같다.
지은이는 팔대산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 결과에다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버무려 물 흐르듯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찬란한 왕족이 패망 후 도망쳐 나와 저잣거리에서 놀림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미치광이 화가로 세상을 붓칠해 가는 생애를 박진감 있게 그렸다.
국내 독자들에겐 약간 생소할지 모르는 팔대산인은 명나라말 4대 승려화가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중국 문인화의 거두로 칭송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팔대산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파초, 괴석, 연꽃, 기러기 등 식물과 동물은 물론 사람의 특징을 정확히 잡아내 간략하게 그리는 ‘발묵화조화’ 기법의 중국 시조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개척한 예술론은 현대 중국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줬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런 점들이 바로 전세계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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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노려보는 새’ ‘기이한 형상의 바위’ ‘마르고 시든 연꽃’ ‘눈을 부릅뜬 물고기’ ‘두눈이 새까만 고양이’ 등은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는 술은 두 되를 못 마실 주량이었지만 술 마시길 좋아했다. 또한 취하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울기를 자주했으며, 취중이지만 단박에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주사(?)도 부렸다. 하지만 세도가가 그림을 그려달라며 비단 한 필을 가져오면 그 비단으로 버선을 만들겠다며 거절했다. 이 모습은 조선시대 화가인 오원 장승업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 책이 한 인간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뤘음에도 전기가 아닌 소설로 쓰여진 것은 별로 남아있지 않은 빈약한 자료에 있다. 그러다보니 그에 대한 ‘전설’과 ‘소문’이 끊이질 않아 진실이 많이 가려진 것이 사실이다. 지은이는 바로 그의 그림과 비평의 글들을 발취하고 사료에 근거해 팔대산인을 소설로 복원해 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책 곳곳에 그의 그림들이 다양하게 실려 있으나 이야기의 전개와 관련된 그림들은 정작 빠져 있어 글을 읽는 맥이 끊겨 버린다는 점이다.
팔대산인 저우스펀 지음|서은숙 옮김|창해 펴냄|1만9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