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겨울 어느 날 경기도 파주읍 궁전제과. 그곳에는 따뜻한 우유와 롤 케이크를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가족들이 있었다. 단팥빵을 쌓아 놓고 미팅하는 고교생 언니 오빠들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그 뒤에는 7살 박이 군성이가 성애 낀 제과점 유리창 밖에서 두 손을 호호 불며 애처로운 눈으로 진열된 빵이며 도너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군성이는 한 달 간 푼푼이 모아온 주머니 속 5백원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이 돈이면 먹고 싶었던 왕단팥빵이며 크림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만 덥석 거금 5백원을 내고 빵을 사먹기가 아까워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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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꿈꾸는 자의 몫이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군성씨. 꿈을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혼자만 달려가지 않고 이웃과 함께 걸오 온 그의 ‘세 가지 꿈’ 이야기속으로 들어가 보자.
# '부모은중경' 읽고 노인 위한 삶 발원
23살에 군을 전역한 이씨는 아내와 함께 과일과 채소 행상을 2년 간 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서울 가락동 농산물시장에서 농산물을 떼와 밤늦도록 아파트 단지 등을 돌며 열심히 돈을 모았다. 장마철이면 트럭에 쪼그려 앉아 빗물에 젖은 도시락을 먹어야 했고 여름이면 신선도가 생명인 야채와 과일을 다 팔기 위해 모기떼와 싸우며 장사해 모은 돈으로 경기도 파주에 작은 슈퍼마켓을 차릴 수 있었다. 개업한지 4년이 되던 해 6평짜리 구멍가게에서 40평짜리 대형슈퍼(?)로 확장할 정도로 장사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잘됐다.
“슈퍼를 시작 한 후 5년 동안은 먹고 살기에 바빠 남을 챙긴다는 건 엄두도 못 냈죠. 그런데 우연히 접한 <부모은중경>을 접하고부터는 생각이 싹 달라졌습니다.”
그 후 5년간 이씨는 인근 노인정 세 곳을 정해 놓고 명절이면 만두와 가래떡 20상자씩을 할아버지 할머니께 보내드리며 이웃에게 온정의 손길을 펴기 시작했다. 서투른 칼질로 아내와 함께 가래떡을 써느라 지금도 이씨의 손은 여기저기 베인 상처투성이다. 하지만 “자네 덕에 떡국 맛있게 잘 먹었네”라며 건네는 어르신들의 말 한마디에 언제나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이런 이씨의 보살행에 고마움을 전하는 노인분들의 표현방식도 다양했다. 봄이면 산나물이며 쑥, 냉이 등을 캐다 주는 할머니며 사군자를 쳐주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10년간 슈퍼마켓을 운영해 번 돈보다 5년간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깊은 정을 나눈 것이 훨씬 큰 행복이죠.”라고 말하는 이씨. 두 번째 꿈을 위한 그의 1막의 꿈은 그렇게 영글어 가고 있었다.
# 정성스런 밀가루 반죽, 웃음 가득담은 단팥
10년간 일궈온 잘나가던 슈퍼마켓을 접고 지금의 ‘케익하우스 쉐프’로 전업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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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지 않는 삶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스님들처럼 저 또한 그토록 소망했던 어릴 적 꿈을 꼭 이루고 싶었습니다.”
퍽 벌이가 괜찮았던 슈퍼마켓을 그만두고 경기에 민감한 제과점을 차린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힘들게 번 돈 다 날릴 생각이냐” 라며 급구 말리는 어머니며 “창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망하기 쉽다”고 재고를 바랬던 큰형님. 이 같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 이씨는 마침내 제과점을 차렸다. 당초의 슈퍼마켓보다 벌이는 녹녹치 않았지만 어릴 적 꿈을 이뤄 창업한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이씨의 가슴은 여전히 벅차다. 요즘 그는 한 가지 행복이 더 생겼다.
슈퍼마켓을 하며 무료만두 배식 바통을 이어 2년째 ‘사랑의 빵’을 장애인, 가출 청소년과 고아들을 돌보는 복지단체 그리고 외국인 근로자 기숙사에 배식하고 있다. 그것도 단순히 밀가루 반죽해서 그 안에 단팥을 넣어 만든 인스턴트 빵이 아닌 쉐프만의 자랑인 ‘비엔느 와즈’를 배식하고 있다. 이것은 반죽을 해서 반나절 동안 숙성을 시켜 다른 재료들과 다시 반죽해 오븐에 구어 내야해 손길과 정성이 많이 가는 빵이다.
“부처님도 말씀‘무주상보시’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이렇게 대접해 줬으니 고마움과 감사의 뜻을 이만큼 받아야지’라는 마음까지도 내려놔야 진짜 봉사죠.”
제과점을 하면서부터 이씨는 연예인 못지않게 많은 팬레터를 받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쉼터’에 있는 윤정이(12)가 보내 온 카드다. 그 속엔 연필로 그린 이씨의 초상화와 “아저씨. 맛있는 빵 주셔서 고마워요. 아저씨가 우리 아빠였음 좋겠어요.”라며 또박또박 눌러 쓴 편지다. 하루에도 수 백 명의 손님을 상대하다 보니 때론 짜증 낼 법도 하지만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위생이 생명인 빵을 손으로 덥석 집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손님에게까지도 말이다.
“중국 속담에 장사를 하면서 웃지 않으려거든 장사하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요. 웃음 속에 돈도 있고 건강도 있고 행복도 있지 않을까요? 허허허”
# '농업기술보급센터'건립 좋은 쌀 개발 원(願)
그의 마지막 꿈은 양복 입고 농사짓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농사를 짓는다? 그것은 농업의 자동화·기술화·현대화를 일컫는 말이다. 이씨가 이런 생각을 가진 이유는 간단하다.
아버지 혼자서 쟁기로 논을 갈고 땡볕에서 피(잡초)를 뽑는 모습에 너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이씨는 향후 10년 안에 현재 대학에서 농업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큰형 이문성씨(44)와 함께 고향인 파주에 ‘농업기술보급센터’를 세워 도시의 젊은이들도 시골에서 농사짓기를 희망하는 시대가 오도록 만들고 싶다는 게 생애 최대 목표다.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은 외국 쌀과 경쟁할 수 있는 우리 쌀, 특용작물, 시설작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농기계의 과학화가 최우선입니다.”
세계 최강의 농업국을 만들겠다는 이씨의 포부. 어릴 적 소중한 꿈을 차곡차곡 이뤄왔던 것처럼 그의 세 번째 꿈을 기대해 본다. 물론 어려운 이웃들에게 품질 좋은 우리 쌀을 보시하겠다는 것도 세 번째 꿈속에 포함돼 있다.
자신의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며 그 속에서 보시행도 펼쳐가는 이씨의 꿈들이 진정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은 ‘자타불이(自他不二)’ 실천하는 그의 향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