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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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佛敎),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


점수(漸修)는 돈오 그것을 실천하는 일

좀 엽기적이었나요. 돈오가 ‘깨닫는 경험 혹은 사건’을 말하지 않고, ‘깨달음의 성격’에 대한 지적(知的) 통찰 혹은 이해라는 말에…. 아직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신 분들을 위해 이 말을 좀 더 부연해 보기로 합니다.

왜 돈오가 제창되었습니까. 거기에는 불교가 오랫동안 깨달음의 성격을 오해해 왔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때까지 불교는, 계율을 지키거나 좌선을 오래 하고 있으면 우리의 정신이 고양되며,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어떤 경지가 열린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같은 점오(漸悟)를 일거에 망치로 두들겨 깬 사람이,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선의 실질적 창시자 육조(六祖) 혜능(惠能)입니다.


점수(漸修)는 돈오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몸은 보리수, 마음은 거울

너무나 유명한 그 화두를 기억하시겠습니다. 나이 든 신수가 벽에 붙인 시 구절은 어떠했습니까. “내 마음은 거울이니, 시시로 부지런히 거기 낀 먼지를 닦아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스승 홍인의 실망감은 컸습니다. “그리 하면 큰 죄는 짓지 않겠지…. 다들 신수를 본받아라.”

그러나 정작 인가를 받은 사람은 스무 살 청년인 혜능이었습니다. 혜능이 남방의 오랑캐였고, 또 일자무식이라는 사실이, 혹은 허구적 설정이, 돈오(頓悟)를 말하는 돈교(頓敎)의 파격적이고 혁신적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무대장치 같지 않습니까.

혜능은 “몸은 보리수도 아니고 마음 또한 거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어디 먼지 앉거나 때가 끼는 곳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 마음이 신분·성별·직업·인종·차종(車種)에 상관없이, 아파트 평수, 강남·강북, 서울·지방에 상관없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미 완전하기에, 우리는 더 이상 닦을 것도 찾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돈오입니다.

하여 제가 해석하기에는, 돈오(頓悟)란 “깨달음(悟)이 이미(頓) 와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선은 다른 말로, “깨달음에는 점차(漸次)와 계제(階梯)가 없다!”고도 즐겨 표현합니다. 그래서 선은, 즉심즉불(卽心卽佛), “네가 곧 부처이니, 어디 딴 데서 찾을 생각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수행이 필요하지? 이미 깨달아 있다면서….” 깨달음에 대한 지적 통찰은, 그것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살아나가는 일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 노력을 우리는 점수(漸修)라고 부릅니다.

돈오는 그런 점에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돈오는 불교적 진실에 대한 지적 통찰이니, 그것은 이제 시작이고, 전제일 뿐입니다. 그 불이(不二)의 진실을 삶에서 구현해나가는 것은 그의 삶 전체를 바쳐야 하는 멀고 힘든 길입니다. 왜 지눌 스님이 해오(解悟)를 앞에 두고도 다시 증오(證悟)를 내세웠겠습니까. 그 고구정녕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돈오와 점수는 새의 양날개

제2강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취지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돈오(頓悟)는 쉬운데 정말 점수(漸修)가 어렵습니다!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되, 그 이치를 진정 믿기가 어렵고, 또한 그 가르침대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돈오를 이렇게 천박하게, 가볍게(?) 해석하는데 대해 눈을 흘기시는 분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방패막이 삼자면, 이 또한 제 독단이나 창안이 아니라 옛적 지눌 스님께서 돈오를 해석하신 그대로입니다. 스님은 돈오란 다름 아니라 “마음의 실상에 대한 지적 이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돈오(頓悟)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漸修)에 속합니다. 그것은 끝이 없는 심화와 지속의 실천적 과정입니다. 깨달음 한 번에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마치겠다는 턱없는 과욕과 오만을 버리십시오. 그럴 수는 천만 없습니다. 경허대사의 탄식인지, 자부인지 모를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돈오라는 점에서 내가 어디 부처와 다르겠느냐만, 다생(多生)의 습기(習氣)가 깊어서… 바람은 멎었으나 물결은 아직 일렁이고, 진리를 알았지만, 상념과 정념이 여전히 침노한다(頓悟須同佛, 多生習氣深. 風停波尙湧, 理現念猶侵).”

그렇습니다. 돈오와 점수는 새의 두 날개처럼,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를 지켜주고 보완해주는 쌍둥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즉, 돈오한 ‘이후에’ 점수를 하라는 말이 천만에, 아닙니다. 또 성철 스님은 돈오로 대장부 일대사 모든 것이 끝났으니 점수를 더 이상 언급도 하지 말라고 단칼로 내치시지만, 그러나 어떤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도 다생의 습기는 떨치기 어렵고, 또 유혹과 실수 앞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화엄과 선이 같은 곡조를

그래도 제가 돈오와 점수를 매우 자의적으로, 제 멋대로 해석한다고 몽둥이를 드시는 분이 많을 듯합니다. 전 시간에 읽은 원효의 <화엄경 소> ‘서(序)’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4) “지금 이 경(經)은 원만무상(圓滿無上)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이라, 법계법문을 널리 열어 무변의 행덕(行德)을 현시한다. 행덕을 거리낌 없이 내보여도 계단이 있는 까닭에 가히 닦을 수 있고, 법문이 끝이 없으나 열어도 모두 부합하는 까닭에 가히 나아갈 수 있다.”

“그 문에 초입(超入)한 사람은 들어섬이 없기 때문에, 들어서지 않음이 없다. 이 덕(德)을 닦는 사람은 얻음이 없기 때문에 얻지 않음도 없다. 삼현십성(三賢十聖)이 이에서 행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삼신시불(三身十佛)이 구비치 않은 덕이 없으니 (화엄경의) 그 문장이 밝게 빛나고 그 뜻이 넓고 무궁함을 무슨 말로 칭탄하랴.”


(5) “대방광불화엄(大方廣佛華嚴)이란 이름은, 법계가 무한하기에 대방광(大方廣)이요, 행덕이 끝이 없으므로 불화엄(佛華嚴)이다. 대방이 아니면 불화를 넓힐 수 없고, 불화가 아니면 대방을 장엄할 수 없다. 이래서 방(方)과 화(華)의 뜻을 함께 들어 그 광엄(廣嚴)의 종(宗)을 드러냈다.”

앞뒤 제하고, 여기 법계(法界)는 ‘이미 완전한 세계’를 가리키고 있고, 행덕(行德)은 그 세계를 삶에서 실현해나가는 중생들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법계가 돈오(頓悟)를 가리킨다면 행덕은 점수(漸修)를 보여줍니다. 각각의 중생들은 이미 완전한 세계에서, 자신들의 몸과 입과 마음의 업(業)으로, 삶이 완전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가 이미 완전하므로, 그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분, 직업, 인종, 빈부와 귀천에 상관없이 그들은 이 완전한 우주를 화엄(華嚴), 즉 꽃으로 장식하는 주인공들이니 말입니다. 우리 중 누구 하나가 빠져도 이 세계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큰 믿음과 자부를 가지고, 이 짧은 한 생, 책임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사십시다. 그것이 불교(佛敎),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
2005-07-05 오전 10:54:00
 
한마디
송구하지만, 교수님 상당히 혼돈하고 계시는거 같습니다. 육조 스님의 선문에서 돈오는 단박 깨침으로 확철대오를 표준으로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또 본래 부처 입장의 조사선, 간화선에서 점수란 방편이지 법은 아니지요. 교학이나 위빠사나에서나 맞는 말이지, 선문에서 점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선의 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선을 이해로 즉, 알음알이나 사량분별로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불립문자 언어도단 단도직입의 뜻을 바로 아신 것이 아닌거 같습니다. 중도 연기를 마음으로 깨쳐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허물이 많습니다. 악~
(2005-07-06 오후 11: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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