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조선시대 ⑪
나라의 제도가 정비되고 유교적 학문이 사회를 이끌어 안정되니 자연스럽게 풍류적 기풍이 일기 시작했다. 정철과 윤선도의 등장은 바로 그 좋은 예로, 이들은 오랜 적거생활 속에서도 차를 즐겼다. 이런 기풍으로 한편으로 회방(外防)에 힘쓰지 못하여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환란을 겪게 된다. 전란으로 인해 남녘의 차 생산기반이 무너지고 많은 다농들이 생산 현장을 지키지 못했다. 더구나 왜구들이 자기장을 강제로 납치하고 수많은 다기들을 훔쳐갔다. 이런 상황은 선비다풍의 퇴조를 가져왔고, 사찰의 차생활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도 선가(禪家)에서는 조금씩 자급하여 쉬지 않고 차문화를 이어갔으며 이름 있는 다승이 출현한다.
중국은 차의 주산지인 장강(長江) 이남의 강소, 복건, 광동, 광서 등을 중심으로 명인 명품들이 계속 배출됐고, 다서도 꾸준히 저술됐다.
일본은 천리휴의 활동이 왕성했으나 풍신수길의 차에 대한 태도를 검박을 바탕으로 하는 차인들과 달라 황금다실을 짓는 등 사치스럽게 변했다.
① 정철(1536~1593): 어려서 궁중에 출입할 때부터 차를 마셔 다시 몇 편이 전한다. <관동별곡> <훈민가> 등을 남겼다.
② 김육(1580~1658): 청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으며 영의정을 지낸 차인이다. <유원총보(類苑叢寶)>에 차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③ 취미대사(1590~1668): 부휴와 벽암대사에게 수학한 선학(禪學)의 대가로, 다시를 남겼다.
④ 윤선도(1587~1671): 긴 유배생활 속에서도 강호연파와 어울리고 호연정(浩然亭)에서 차를 마시는 풍류를 누린 차인이다.
⑤ 김우옹(1540~1603): 퇴계 문인으로, 다시를 남겼다.
⑥ 중관대사: 임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으며 차를 즐겨 다시를 지었다.
⑦ 백곡대사: 안심사에 주석하고 차를 즐겨 마셨으며 다시가 여럿 전한다.
⑧ 웅명우: 명대 차인으로 <나개다기>를 지었다.
주고: 명대 학자로 도공과 도토에 관한 <양선명호계>를 남겼다.
⑨ 황일정이 쓴 것으로 신ㆍ구의 차 이름 백여종 씩을 싣고 있다.
⑩ 원굉도가 찬술한 용정차와 천지차에 관한 기록이다.
⑪ 포르투갈 사람 바리냐니의 글에 일본차에 관한 설명이 전한다.
⑫ 나숙 선사가 술과 차를 의인화하여 쓴 이천여자의 글이다. 이보다 먼저 중국 왕부의 <다주론(茶酒論)>과 <다주사문(茶酒四問)> 등이 있다.
⑬ 우치의 다사(茶師)인 상림가(上林家)는 수길의 특별한 배려로 크게 성장했다.
⑭ 임란 중 우리 문화재 강탈과 도공 납치는 계획적이고 무차별적이었다. 그 후 일본의 차는 한층 발전했고, 도예도 크게 향상됐다.
<한국>
1578 다시(茶時)를 행하다(정원이 건의)
1580 정철(鄭澈)이 강원도 관찰사 부임①
김육(金堉)의 출생 ②
1584 취미(翠微) 대사 ③
율곡의 죽음
1587 윤선도(尹善道)의 출생 ④
@ 김우옹(金宇顒)의 활동 ⑤
1592 임진왜란 발발
관례 홀기에 철다(啜茶)가 나옴
1593 중관(中觀) 대사 ⑥
1597 정유재란
1598 이순신의 전사
백곡(白谷) 대사 ⑦
<중국>
@ 웅명우(熊明遇), 주고기(周高起) ⑧
1580 사시육상록(고염)
1582 민대기(閩大記) 왕음산-무이차를 높이 평가
1591 <사물감주(事物紺珠)> ⑨
1595 다록
1597 <서호기술(西湖記述)> ⑩
장대의 출생
<일본>
1578 리휴가 수길의 다두(茶頭)가 됨
1579 일본인의 음다 ⑪
일본순찰기 ⑫
1580 수길의 ‘황금다실’
1586 수길이 상림가(上林家) 방문 ⑬
1587 수길의 집권
1589 차생산 농가 부역 면제
@ 도공납치, 도가지 강탈 ⑭
@ 우치차의 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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