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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사진 뒤에는 '선(禪)'이 있었다"
사진계의 전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과 불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근대사진의 최고봉이자 현대 영상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진작가. 사진을 기록에서 예술로 승화시킨 주역이자, 포토저널리즘의 새로운 역사를 연 인물로 평가되는 20세기 예술계의 산증인. 바로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 Henri Cartier-Bresson)이다.

그의 서거 1주년을 맞아 예술의 전당에서 대규모 특별전 ‘찰나의 거장전’(~7월 17일까지)이 열리고 있는 가운데, 불교와 브레송의 관계를 조명한 세미나가 열려 화제가 되고 있다.

이경홍 교수(경일대 사진영상학부)는 지난 6월 25일 열린 세미나 ‘선의 찰나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서 브레송의 사진작업은 선(禪)과 둘이 아님을 역설했다. 브레송과 불교의 인연은 그간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내용이라 세간과 출세간의 이목이 동시에 집중되고 있다. 세미나 내용과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해 ‘브레송과 불교’를 조명해 본다.



브레송과 사진

팔레-루아량 공원
“나는 때를 기다리는 신경다발이다. 그것은 오르고 올라 마침내 터져 버린다. 그것은 육체의 기쁨이고, 춤이고, 시간이고 또 얽힌 공간이다. 그래, 그래, 그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결말처럼, 보는 것이 전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 즉 ‘찰나’라는 개념 없이 논할 수 없는 사진가다. 그는 움직이는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는 것을 사진의 핵심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그 찰나는 쉽게 잡을 수 없다. 찰나는 개념도 논리도 아닌 까닭이다. 브레송에 따르면 “머리와 눈과 마음을 같은 축에 모두 담아 대상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찰나와 마주할 수 있다.” 또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사람에게 찰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 안’의 개념인 순간과, ‘시간 밖’의 개념인 찰나가 구분되는 것이다.

브레송이 잡아내는 찰나의 대상은 인물과 풍경 등 다양했다. 특히 그는 20세기를 풍미한 지식인들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진평론가 최봉림씨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사시(斜視)의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실존주의 철학자의 표상이 됐고, 공손한 표정으로 사진기를 응시하는 퀴리부부는 연구와 실험밖에 모르는 백면서생의 상징이 됐다”며 “일종의 궁사, 저격수의 시선으로 모델들의 내면과 정신의 상태, 그리고 기질을 순간적으로 결정하면서 20세기를 풍미한 인물들의 아이콘을 만들어 내는 위업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프로방스 그림자 자화상


브레송은 특히 2차대전 중에 나치즘, 파시즘에 맞서 포로와 탈주자들을 돕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사진의 바탕에 인간애를 심게 된다. 멕시코의 창녀, 인도의 깡마른 아기, 휴가를 즐기는 평범한 사람 등의 사진에 휴머니즘을 담았다. 사진가 리샤르 아브동은 “그는 사진의 톨스토이였다. 깊은 인간애로 20세기를 증거했다”고 말했다.



브레송의 삶과 불교

브레송은 불자였다. 한 사진전문가는 그를 “사람들을 처음 만날 때는 합장으로써 예를 갖출 정도로 신심이 돈독한 불자였다”고 회고한다.

평소 독서를 즐겼던 브레송은 힌두이즘과 도교 등의 동양철학 서적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특히 입체파 화가로 유명한 브라크로부터 <선불교와 궁도의 예술>이라는 책을 권유받으면서 선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를 키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인도와 중국에 머물면서 선불교를 다시금 접하게 되고, 이후 일본 체류기간 동안 ‘다이토쿠-지 절’ 등 선불교 전통이 남아있는 사찰 등을 렌즈에 담으며 영감을 얻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일본 선시(禪詩)인 하이쿠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다이토쿠-지 절
불교에 조예가 깊은 예술인들과도 자주 만나 불교 이해의 틀을 넓혔다. 선불교와 시학에 대해 정기적으로 강의를 펼치던 프랑스 유명 시인인 이본느 본느프아, 승려와 철학자 저자이자 세포 유전학 분야의 과학자로 일하다 티베트 승려가 된 ‘마티유 리카르’ 등과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불교를 배웠다.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유명 사진가인 부인 마틴느 프랑크의 영향도 컸다. 부인은 티베트불교 신자로서, 선불교에 심취한 그에게 티베트불교를 소개한 인물이다. 프랑크는 티베트의 환생한 스님들을 주제로 사진을 많이 찍었고, 기회가 닿는 대로 브레송과 티베트불교 스님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 영향으로 브레송은 달라이라마도 여러 차례 친견한 바 있으며, 달라이라마를 직접 사진에 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죽기 1년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티베트의 한 스님 밑에서 죽음을 준비했다고도 전해진다.



브레송의 ‘불교와 사진’

브레송의 선불교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사진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 대한 연구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경홍 교수는 “그는 사진을 통해 선(禪)의 정신을 마주했으며, 선을 통해 자신의 작업에서의 성취를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Samuel Beckett


브레송은 책으로 선을 배웠지만, 사진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여긴 것처럼 보인다. 브레송은 “작업 하나하나가 질문의 과정이었다. 사진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방식이다”라고 밝혔다. 사진작업도 수도의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승들이 매 순간 화두참구에 몰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브레송은 “집중되는 찰나에 숨을 죽이고 나를 포함한 모든 결정적인 것을 그 찰나에 개입시킬 것”을 강조했다. 깨달음을 위한 선사들의 치열함을 대변하듯, 그는 한 가지 상황에서 반롤 이상의 촬영을 강행하기도 했다.


Marcel Duchamp in his studio


전문가들은 브레송이 강조한 ‘보는 작업’ 역시 불교와 통하는 개념이라고 평가한다. 이경홍 교수는 “팔정도에서 가장 첫 단계가 바르게 보는 것(正見)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보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브레송은 생전에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기에, 찰나는 새로움의 반복이자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사진가는 분별이나 판단을 하지 말고 항상 주시자로 남아있어야 한다. 주시는 진리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뜻을 전한 바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독백이 남았다. “나는 거기에 있었고 또 그 순간에 삶이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방법이 있었다.”


미국 뉴욕시 흐보켄의 화재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주요연혁

1908 프랑스 세느-에 마르느의 샹틀루에서 큰 섬유회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남
1932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첫 개인전 개최
1936~39 4편의 기록영화 제작
1940 2차 대전 중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가 세 차례 시도 끝에 탈출 성공. 레지스탕스 조직 MNPGD에 참여.
1946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초대 개인전
1947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모어, 조지로저 등 4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과 함께 사진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사진에이전시 ‘매그넘(Magnum)’ 설립
1948~50 인도, 버마, 파키스탄, 중국,(국민당 몰락전과 공산당집권 전후), 인도네시아(독립시기) 등을 다니면서 작업
1952 사진집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출판
1954~55 스탈린 죽음 이후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소련 공식방문을 허락받음.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진작가 최초로 개인전 열었음.
1965 일본 아사히 신문사 초청으로 일본방문 촬영
1968~72 <세계의 인간과 기계>, <프랑스>, <아시아의 얼굴> 등의 작품집 출간
1981 프랑스 문화부장관으로부터 국립대훈장을 받음
2003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재단 설립
2004 사망
강신재 기자 | thatiswhy@buddhapia.com
2005-06-30 오후 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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