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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고 닦고 희망지키는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8년간 안동 문화재 찾아다니며 보호활동

여느 해보다도 빨리 찾아온 무더위로 지쳐버린 토요일 오후. 한 손에는 떡 상자를, 다른 한 손에는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든 안동문화지킴이(대표 임재해) 총무 김호태씨가 뙤약볕 아래 걸음을 재촉한다. 넷째 주 토요일인 6월 25일 오늘은 안동문화지킴이 정기모임이 열리는 날. 이런 날은 늘 이렇게 바쁘다.

김호태 씨.
40여명의 회원이 만휴정(경북유형문화재 제173호, 1500년)에 모였다. 엄마·아빠 손을 잡고 따라나선 꼬마아이부터 향토사전문가까지 다양하다. 정기모임은 청소로 시작됐다. 뜰의 잡초를 뽑고, 만휴정을 쓸고 닦으며 참가자들은 정자를 세운 청백리 김계행의 기품도 느껴본다.

안동문화지킴이는 안동문화와 문화재를 지키자는 취지로 1997년 출범한 안동의 시민단체다. 지난 8년간 안동 지역 내 꾸준하고 왕성하게 문화재보호활동을 벌여왔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에는 문화재청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특히 안동문화지킴이의 ‘한 가족 한 문화재지킴이’ 운동은 문화재청이 올해 의욕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1문화재1지킴이’운동의 모델이 됐다.

안동 경일고등학교 국어교사인 김호태씨는 안동문화지킴이 발족의 주역으로, 지난 8년간 실무지킴이·총무지킴이 등을 역임하며 살림을 도맡아왔다.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안동문화지킴이 정기모임, 문화유산해설사 교육프로그램 강의, 월간 <사람과 문화> 편집 등 안동문화를 지키는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였다. 이를테면 오늘의 안동문화지킴이를 일군 숨은 공신인 셈이다.

청백리 김계행 공의 청렴함이 배어있는 만휴정에 앉은 김호태 씨.


김씨의 안동문화사랑의 이력은 1993년부터 시작된다. 김씨는 안동문화연구회를 만들어 향토사학자들과 함께 안동문화를 공부하는 한편, 1995년부터 그가 재직하던 경일고 학생들과 안동문화사랑반을 꾸렸다. 줄을 꼬아 줄다리기를 해보고 차전놀이도 해보는 등 학생들의 직접적인 문화체험을 도왔다.

그런 작은 활동 가운데 김씨는 문화재 시민운동이 절실함을 깨닫게 됐다. 학창시절을 마치고 타지로 떠나고 나면 안동문화를 접할 기회를 잃고 마는 청년들, 안동에 살면서 정작 지역 문화재의 가치에 무지한 채 그냥 지나쳐버리는 무심한 주민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안동문화는 머잖아 사라지고 말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들었다.

청백리 김계행 공의 청렴함이 배어있는 만휴정을 쓸고 닦는 안동문화지킴이 회원들. 맨 왼쪽이 김호태 씨.


“안동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광지 개발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었지요. 개발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안동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이 선행돼야 함을 알았습니다. 안동문화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발만 하다보면 정작 안동의 멋은 사라지게 될 테니까요.”

김씨는 뜻을 같이 하는 5~6명과 함께 안동문화지킴이를 1997년 발족했다. 민속학자인 임재해 안동대 교수를 대표로 위촉했다. 회원들은 안동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화재를 찾아가 직접 쓸고 닦으면서 몸으로 안동문화를 배웠고, 문화재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그들의 열정적인 활동은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덕분에 출범당시 50여명에 불과했던 회원수가 지금은 600여명(회비납부자기준)을 헤아릴 정도로 성장했다.

김호태 씨.


회비만으로 시민단체 살림을 꾸려가기가 쉽지는 않다. 아직도 변변한 사무실 한 칸 없이, 지인의 도움으로 건물 복도 공간을 빌려 쓰는 형편이다. 하지만 김씨는 큰 문제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민운동 하는 이들이 ‘돈이 없어 어렵다’고 말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돈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림을 줄여 살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큰 욕심 내지 않고 회원들의 회비만으로 안동문화지킴이를 운영하다보니, 단체의 자산은 불어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값진 재산인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안동문화지킴이는 안동시민 사이에서 ‘자발적이고 깨끗한 시민단체’로 통한다. “뜻이 바르고 하는 일이 옳다면 억지로 서두르지 않더라도 사람이 모이고 돈도 모이는 법”이라고 믿는 그에게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그는 이 같은 지혜를 불교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김호태 씨.


“고등학교시절 불교학생회에서 초파일을 맞아 안동 대원사에서 1080배를 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났죠. 하지만 죽비 소리에 맞춰 천천히 1배 1배 올리다보니 결국 1080배를 해낸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안동문화지킴이를 시작할 때도 ‘그게 과연 잘 될까’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그래도 김씨는 확신을 갖고 한 걸음씩 걸어왔고, 여기까지 왔다.

불교 얘기가 나오자 봉정사 신도답게 봉정사 자랑을 이어간다.
“봉정사 만세루는 사방이 탁 트여있어 그 곳에서 내려다보면 천등산 자락이 봉정사 정원인 양 펼쳐집니다. 700여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극락전·대웅전 등과 자연이 어우러진 장관을 보면 숨이 턱 막히고 맙니다. 순간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지요.”

만휴정에 오르는 김호태 씨.


김씨는 봉정사의 또 다른 매력으로 구석구석 남아있는 민가의 양식을 꼽는다. 지금은 대웅전에만 남아있는 툇마루와 난간이 본래 극락전에도 있었다는 것. 양반집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은 안동지역만의 특색이며, 그래서 더 정겹단다.

하지만 봉정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봉정사는 극락전 등 국보와 보물이 즐비한 사찰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까닭은 이곳이 수백 년 동안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찾아와 기도하던 곳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드려 아들을 얻고, 그 아들이 자라나면 다시 이 절을 찾아와 기도를 하고…. 그렇게 대대로 이어온 조상들의 정성이 이곳 봉정사에 서려 있습니다.”

김호태 씨.


최근 몇 년 새 문화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무척 높아졌다. 지킴이 활동에 아이들 손잡고 나타나는 부모들이 점점 늘고 있고, 올해 시작한 문화유산해설사 교육에 참가하는 이들의 열기가 뜨겁다. 김씨는 거기서 희망을 발견한다. 문화재는 결국 사람이 가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킴이 활동은 결국 우리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김씨. 문화재를 지키고 가꾸려는 그의 원력이 안동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길 기대해본다.
글=박익순 기자ㆍ사진=박재완 기자 |
2005-07-02 오전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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