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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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과의 대화】효란스님(오봉사 주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부처님 뜻"


장례법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주요한 관심사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화장과 납골이 얘기된다. 여론조사에서는 화장과 납골을 선호하는 추세가 높아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불교에서는 일찍이 화장하는 것이 장례법의 전형으로 자리잡았으며, 최근에는 묘지난과 환경오염의 피해를 들어 화장법을 장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인데도 부모님만은 묘지에 모시겠다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왜 화장과 납골을 해야 하는지,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 등 어려운 시기를 헤쳐온 80의 노스님이 젊은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지, 또 일본문화의 유입, 정보통신의 발달, 군포교 등 요즘 우리 사회의 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효란스님에게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납골당을 준비하고 계신데, 아직 화장률이 높지 않습니다. 불교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최소한 불자들은 화장을 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화장을 왜 기피하는 것일까요?

효란 스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움과 슬픔으로만 받아들입니다. 육친에 이끌리는 정 때문이지요. 그러나 불교에서의 죽음은 적멸(寂滅)입니다. 그리고 정토로 환생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민족에게는 유교 사상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조선조 500년 동안 불교를 배척했고, 유교를 한민족 생활의 지배원리로 삼았습니다. 지금도 절에서 제사를 지낼 때 숟가락을 꼽는데, 혼백이 와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교의 관습입니다. 유교에서는 죽은 사람도 3년 동안은 살아있는 것으로 봅니다. 상주들이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묘소를 지켰는데,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잘 사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유교를 기초로 생활이 이뤄졌기 때문에 당연히 매장을 했는데, 신라 때만 해도 화장이 많았어요. 일본의 경우는 왕도 화장해서 모신 것이 많습니다. 불교식대로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유교식대로 하는 경우가 많으니, 종단의 권위있는 기관에서 불교의 여러 의식을 불교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정비해 시행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불교의 장례법은 석가모니 부처님에게서 유래합니다. 부친인 정반왕을 손수 다비했습니다. 석가모니 자신도 다비하도록 유언을 했고, 다비 후 유골을 여덟 나라에서 가져가 불탑을 건립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생활화되지 않아 화장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불교가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국가법령에는 화장 또는 매장에 관한 규정이 없지만 모두 화장하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생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일본인의 마음 속에는 불교문화의 뿌리가 깊습니다. 우리 민족은 유교의 뿌리가 깊다보니 화장은 아직도 드물지요. 그러나 앞으로는 화장이 급속히 늘어날 것으로 봅니다. 요즘 웬만한 사람들도 화장을 선호하고 있다는 조사가 나오잖아요. 지난 청명 때 묘소를 파서 유골을 화장해서 뿌린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화장을 해야 하는 이유를 부처님 가르침에 바탕해서 들려주십시오.

▲원래 고대 인도에는 화장, 수장, 토장, 풍장 등의 장례법이 있었는데, 왕과 같은 경우는 화장을 했어요. 화장이 불교 특유의 장례법으로 정착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구를 화장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대반열반경>에 화장에 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가르쳐준 전륜성왕의 장례법입니다. “먼저 향탕(香湯)으로 그 몸을 씻고 새 옷으로 두루 몸을 감싸되, 오백 겹으로 몸을 감싼 뒤에 황금의 관에 넣고 기름을 거기에 쏟는다. 다시 그 황금의 관을 쇠로 된 관 속에 넣고 전단향의 목관으로 그 겉을 다시 싸고, 온갖 기이한 향을 두텁게 쌓아 불을 붙인다. 그리고 나서 사리를 거두어 네거리에 탑을 세워 거기에 넣고, 겉에는 비단을 걸어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의 탑을 보고서 그 바른 교화를 사모하여 많은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신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화장했습니다. 화장을 하건 또는 매장, 풍장을 하건 육신이 없어지는 것은 같습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갑니다. 불교에서의 죽음이란 육신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형체가 없어지는 것, 모양도 소리도 없어지는 것, 적멸(寂滅)이지요. 그러니 모습도 없어져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49일 동안만 이 세상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7일마다 염라대왕이 심판을 하지요. 악업을 지었으면 벌을 받고, 선업을 쌓았으면 공덕을 받는데, 49일째가 판결을 받는 날이죠. 죽으면 모습이 없어지니 예토(穢土)인 이 세상에 모습을 두지 말자는 것입니다.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환생하라는 것이지요. 다만 가까웠던 사람의 유골을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요. 납골은 아직 인식이 넓지 않아요. 화장은 하지만 납골은 하지 않고 있어요. 화장해서 산에 뿌리기보다는 곁에 두고 모시려는 효성이 있으니 납골도 늘어날 것입니다.

─납골당을 혐오시설로 생각해 지역주민들의 반대도 있었으리라 보는데요. 어떻게 설득하셨는지요?

▲앞에서도 얘기했듯, 우리 민족의 생각 속에는 죽음이나 해골에 대해 두려움과 혐오감을 갖고 있습니다. 혼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혼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불교에서는 49일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으로 봅니다. 요즘에는 화장 시설이 잘 돼 있어서 화장에 대한 혐오감을 많이 없애주고 있습니다.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이득을 챙기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혐오시설이라며 나오는 것인데, 설득하기보다는 당연한 이치를 애기했지요. 누구나 죽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점쟁이들 하는 말이, 상가에 가면 상문살(喪門殺)이 있어서 화를 당한다. 그러니 상가에 다녀오면 화장실을 한바퀴 돌아야 한다, 그런 말을 해요. 그런데 문상을 가지 않으면 누가 죽은 사람을 수습해줍니까. 괜한 소리예요. 납골당에 뼈를 모시는 것은 부모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효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혐오스럽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죠. 납골당에 모셔진 뼈가 무슨 작용을 하겠어요. 법당에도 유골을 모셔놓고 있는데, 해를 입은 적이 한번도 없어요.

─스님께서는 아미타 염불신앙을 강조하시는데, 납골당 건립도 스님의 신앙관을 현실화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살아있는 중생이나 죽은 중생 모두를 구제하는 원을 세우셨습니다. 아미타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리불아, 만약 착한 사람들이 아미타 부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 이름을 마음깊이 새겨 하루, 이틀 혹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혹은 이레를 두고, 한결같이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외우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수명이 다 할 때 아미타 부처님께서 여러 성인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투시느니라.” 아미타도량인 여기 오봉사에 납골당을 세우는 것은 경전의 가르침대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지요. 염불소리를 듣는 영가들에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성불하라는 원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염불이라고 하면 그만인데, 나는 본원염불이라고 합니다.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이 중생을 염려해서 중생의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 ‘나무아미타불‘ 하고 내 명호를 부르라고 했어요. 석가모니불이나 다른 부처님의 칭하는 것은 찬불, 천수경을 독경이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원이란 말을 꼭 붙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하면 공덕이 쌓입니다. 해독제가 생기는 것이예요. 업이라는 독을 해소하려면 공덕이라는 해독제가 있어야 합니다. 수행의 목적도 공덕을 쌓아 부처님께 회향하는 것입니다.

─스님의 살아온 길이 평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요.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말씀 주시지요.

효란 스님.
▲지금까지 내가 한 행위가 내 뜻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내가 한 것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나서 보니 부처님 뜻이었음을 깨닫습니다. 13세에 출가한 것도 그렇고, 독방에 들어앉혀 300여권의 불교책을 읽게 한 것도 부처님 뜻이었지요. 나를 중으로 만들었고, 공부시키려니 마땅한 곳 없으니 형무소로 보낸 것이죠. 일거수 일투족이 부처님 뜻이라고 믿고 살고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면 고통과 불안이 뒤따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부처님이 나에게 일을 시키려고 오늘도 깨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가끔 법문을 부탁하는 곳이 있어요. 가기 싫지만 거절 못하고 갈 때도 부처님이 여기에 왜 불렀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몇 일 지나면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발생적인 법(法)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을 믿고 시봉하는 사람들은 이같은 자연스런 법에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없애기 전까지는 부처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살고 죽는 것을 부처님에게 맡기는 것, 이것이 불자의 길입니다.

─스님께서는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고, 이후 일본 불교인과 교류가 많습니다. 일본문화 개방 이후 영화 연극 등의 유입이 많습니다. 우려했던 저질문화의 유입보다는 고급한 문화가 들어오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스님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일본문화의 바탕은 불교입니다. 기독교신자건 불교신자건 일본인의 기본자세는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일본 말 ‘아리가도(有難)’는 감사, 사례하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불가사의한 인연으로 생겼다는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 행위로는 성불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성불하게 하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을 생겼으니 고마울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리가도’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나온 말이지요. 일본인의 생활과 문화에는 기본적으로 ‘아리가도’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저질의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지만, 일본인이 추구하는 것에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것이 모두 좋다, 모두 싫다, 그러면 안되고 우리들이 옥석을 잘 구분해야 하겠지요.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일수록 옛 어른들의 가르침과 삶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정보통신의 시대에 옛것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요즘 사회를 지식사회, 정보사회라고 부르는데, 세상이 참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멀리서 왔다가도 하룻밤 묵어가는 일이 드물어요. 바쁘니까요. 현기증을 느낄 정도예요. 나는 정보사회의 본질을 도구가 발달한 것으로 봅니다. 물론 인간이 다른 동물과 비교되는 것은 도구의 사용에 있다고 합니다. 도구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지 정신은 아닙니다. 정신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나고 죽고, 그리운 사람과 헤어지니 고통스럽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싫은 것이 당연하듯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와 가치를 뒤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추우면 옷을 더 껴입고, 더우면 땀으로 열을 식힙니다. 날씨가 변하는 것이지 우리 몸뚱이가 다른 무엇으로 바뀝니까? 정보사회이면서 동시에 지식사회라고 합니다. 지식사회는 앎의 문제인데, 지식과 지혜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선인들의 가르침 혹은 고전(古典)은 도구적인 수준이 아니고 삶의 근본적인 성찰이 담겨 있어요. 정보사회는 삶의 도구의 발달로 우리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지 않거나, 고전의 가르침을 전달하지 않는 정보는 우리들을 빠름의 노예로 전락시킬 것입니다.

정보사회가 도구의 발달로만 치닫지 않도록 인문적 교양과 지식의 중요성이 그 이상으로 커져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불교에서 가르치는 지혜는 정보사회, 지식사회의 등대가 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이곳이 군부대가 많은 곳이어서 그런지 스님께서는 군법당에 자주 가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군포교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실행은 못하고 있습니다. 군포교 활성화 방안을 말씀해 주십시오.

▲몇해 전에 목사 한분이 찾아왔어요. 자기 아들이 교회에 안 가고 이곳에 온다기에 왔다는 거예요. 라면값 하라며 2만원을 주고 가더군요. 그 병사는 이곳에 나오다 제대했는데, 교회보다 절이 편안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바른 종교는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목사 아버지도 수긍했다고 하더군요. 사찰 주변에 군부대가 많다보니 군포교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요. 30여년 동안 매주 일요일이면 군부대를 돌아다녔어요. 요즘은 장병들이 이곳에 옵니다. 30~40명 정도가 오는데 법회 후 라면을 끓여주면 아주 좋아합니다. 군포교는 경제적, 육체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군법당에 빈손으로 갈 수 없습니다. 여기 오는 병사들을 배불리 먹여야지요. 신도들이 협조하고 참여해주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군포교가 필요하다고 입을 열면 한결같이 말하지만, 돈도 보태고 시간도 내서 함께 해야겠지요. 장병들을 불자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군생활의 어려움을 조금 덜어주고 격려해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약력
·1919년 충남 예산 生
·31년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을 은사로 득도
·조선독립운동을 이유로
3년3개월 옥고
·43년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졸업
·46~65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및 보성전문
학교 등에서 문화사
강의
·68년 동헌스님을
은사로 건당
·화엄사 등지에서
안거 수행
·78~83년 조계종
반야회 회장
·83~84년 군법사단
후원회장
·現 오봉사 주석. 고대
한일불교문화교류협
창립추진위원장
·<관무량수경 의역과
해설> <불교의 전통신
앙> 등 편역 및 저술
대담=정성운 차장 |
2000-04-19 오후 2: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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