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34. 조선시대 ⑨
조선 건국 후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생각해 많은 제도가 정비되고, 특히 사찰의 운영과 창건, 사전(寺田) 사노(寺奴)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런 새로운 자리매김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도 사원의 차 생산은 자급할 수 있도록 유지되었고, 선비들의 차는 일상화되었다. 전회에 언급한 서민들의 차생활은 당초 약용에서 출발되었다가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전에 하는 헌다의례에서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게 되었다. 우리 생활에 제의는 신성한 것이었으니 거기에 쓰이는 차도 신선한 음료로 여겨지게 됐다. 그러나 부녀자의 사찰출입이 통제되면서 서민들의 음다풍습이 점점 퇴조하게 됐다. 제의나 노부모의 약용으로는 계속 사용되었다.
중국은 전대에 시작된 의흥 중심의 자사도예가 다기 제작에 큰 붐을 일으켰다. 서우천, 이무림, 심사량, 이중방 등의 명장들이 배출되어 많은 명품들을 만들어 차 애호가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런 속에서도 도륭이나 풍몽정 등이 차 이론서를 남겼다.
일본에서는 차생활이 확대되면서 자득의 이론이 자리 잡고, 특히 고려다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① 부휴선사(1543~1615): 임란 때 승병(僧兵)으로 활동했으며, 후에 대둔사 송광사 쌍계사 등에서 차를 즐겨 마셨다. 벽암(碧岩)ㆍ취미(翠微) 등의 제자를 두었고 다시를 많이 남겼다.
② 사명대사(1544~?): 직지사로 출가해 묘향산 서산대사에게 배웠다. 임란 때 승군(僧軍)을 이끈 공으로 벼슬을 받았고 후에 일본에 가서 강화를 맺었다. 다시가 전한다.
③ 허준: <동의보감>을 완성했으며 그의 화제(和劑) 중에 찻잎이 들어가 있다.
④ 김장생(1548~1631): <가례집람도설>에 자신이 고안안 다선(茶筅)으로 차를 타서 다례를 지내는 내용이 있다.
⑤ 신식(1551~1623):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가례언해>에서 점다에 관해 썼다.
장현광(1554~1637): 벼슬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제례 때 차를 드리는 일에 관해 썼다.
⑥ 도융(1543~1605): 문인이었으나 집이 가난해 글을 써서 생활했다. <고반여사(考槃餘事)>와 <다설(茶說)>을 찬술했다.
⑦ 서우천: 의흥의 도공으로 시대빈에게 배워 크게 발전했다. 수많은 변형과 명품을 남겼다.
⑧ 풍몽정(1546~1605): <쾌설당집>과 <쾌설당만록>에 차에 관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품다(品茶) 초다(炒茶) 장다(藏茶)법을 잘 썼다.
⑨ 정운붕: 화가로 차를 좋아해 ‘옥천팽다도(玉川烹茶圖)’를 남겼다.
⑩ 탕현조(1550~1616): 희곡작가로 ‘모란정’ ‘남가기’ ‘한단기’ 등의 명작을 남겼다. 시문집에 차에 관한 기록이 많다.
⑪심사량: 의흥 도공으로 ‘심다소’라 불렸으며, 작품이 금석(金石)처럼 견고했다.
이중방: 이무림의 아들이며 시대빈의 문하로, 손꼽히는 명장이다.
⑫ 고전직부: 리휴의 제자로 무사다법을 성립시켰다. 초암차와 서원차의 다법을 전했다.
남방종계: 남종사의 암주로 <남산록>을 남기고 자취를 감춘 차인이다.
⑬ 산상종이: 리휴의 제자로 25세에 차 모임을 가졌고 풍신수길의 다두(茶頭)로 있었다.
⑭ 주광과 리휴의 시대를 지나면서 고려다완에 관한 열의가 극도로 높아졌으며, 이는 임란 때 그들이 자행한 도자기 탈취의 배경이 된다.
<한국>
1543 부휴선사(浮休禪師) 출생 ①
1544 사명대사(四溟大師) 출생 ②
1545 사신맞이 다례
주다례
왕의 약에 차를 약재로 넣다
1546 허준(許浚) ③
1548 김장생(金長生)의 출생 ④
1551 사임당 신씨
@ 신식(申湜), 장현광(張顯光) ⑤
<중국>
1540 경덕전 도공들 약탈
1543 도융(屠隆)의 출생 ⑥
@ 서우천(徐友泉)의 활동 ⑦
1546 풍몽정(馮夢楨)의 출생 ⑧
1547 정운붕(丁雲鵬)의 출생 ⑨
1550 탕현조(湯顯祖) ⑩
1552 포르투갈, 마카오 점령
@ 심사량(沈士良), 이중방(李仲芳) ⑪
<일본>
1542 고전직부(古田織部) ⑫
1544 남방종계(南方宗啓), 산상종이(山上宗二) 출생 ⑬
@ 잦은 차회와 고려다완 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