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내소사 회주 우암당 혜산(愚巖堂 慧山) 스님이 6월 13일 오후 3시 내소사 벽안당에서 입적했다. 세수 73세. 법랍 4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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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전 10시 능가산 내소사 산중장으로 엄수된 영결식에는 전국에서 모인 1000여명의 사부대중이 스님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5번의 명종에 이어 고불총림 방장 수산 스님은 법어에서 “홀연히 선사의 시적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동방에 지혜의 별이 떨어짐과 같다”며 “두루한 청산이 모두 이 활안이니 구천에 명월이 선심을 드러냄이다”고 스님의 원적을 애도했다.
이에 앞서 선운사 주지 범여 스님은 영결사에서 “큰스님이 정진하시던 모습과 철저한 무소유의 생활은 후학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며 회고하고 “큰 스님의 가르침과 원력은 봉래 계곡에 메아리 되어 정진대중을 이끌어 주는 법력이 되어 달라”고 기원했다.
영결식을 마친 후 스님의 법구는 만장을 앞세우고 내소사 다비장으로 운구돼 본래 제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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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당 혜산 선사 행장
우암당 혜산 선사는 1933년 음력 9월 6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논산리에서 태어났다. 고교시절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절대절명의 의문을 품고 있던 중 우연히 해안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접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서문을 읽는 순간 무릎을 치고 ‘일대사를 밝히는 책’이라며 밤새워 노트에 베꼈다.
58년 서울대 농대 졸업 후 해안 스님과 3년간 편지로 문답을 나눴고, 63년 내소사 지장암에서 열린 특별정진법회에 참석한 뒤 해안 스님과 처음 상봉한 그 자리에서 출가했다. 이후 은사 해안 스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시봉하며 산철도 없이 정진했다.
64년 서래선림에서 수선안거 이래 제방선원에서 15안거 성만했다. 7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해인총림 해인사 선원장, 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 조계사 주지, 국제불교교류협회 이사, 한국불교 사회연구소 이사장, 전북불교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했다. 89년부터 93년까지 내소사 주지를 맡았으며 입적 전까지 회주소임을 맡아 보며 후학들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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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까이 혜산 스님을 모시고 내소사 가풍을 일으켜온 있는 상좌 진원 스님(내소사 주지)은 “큰 스님은 평소 중도를 강조하고 몸소 실천행으로 보이셨다”며 “선이라고 좋아하거나 악이라고 멀리하지 말고 지혜와 복덕으로 정진하라는 가르침으로 후학들을 이끄셨다”고 말했다.
혜산 스님은 “마음이 주가 되지만 마음은 몸을 의지해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수행하려면 수행도량이 갖춰져야 한다”며 20여 년간 퇴락한 내소사를 떠나지 않고 중창불사에 앞장서 오늘의 가람을 일궜다.
또한 스님은 생전에 “남이 해놓은 것을 자기 것인양 앵무새처럼 떠드는 것은 세상을 더욱 혼란하게 할뿐이다”며 일체 저서를 남겨놓지 않았다.
혜산 스님은 오고감에 걸림없는 바람처럼 평소 주석하던 벽안당에서 홀연히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