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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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광고인 출신 김형권씨가 택시 운전을 시작한 지도 5년째. 홍익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해, 대기업계열 광고회사에서 근무했던 그가 택시를 운전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부장이 돼 국내 기업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으며, 퇴사 후에는 디자인회사를 설립해 사장 소리도 들었다. 또 참신한 아이디어로 대통령 후보 홍보용 포스터를 제작해 이목을 끌기도 했던 그다.
하지만 광고 제작환경이 컴퓨터 중심으로 바뀌면서 이에 적응하지 못한 김씨의 회사는 추락을 거듭해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식당·무역업 등 다양한 일을 하던 끝에 안착한 일이 택시 운전이었다.
할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지만 택시 운전은 그에게 세상을 달리 보게 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택시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1년, 당시 82세였던 모친이 대전에서 길을 잃었는데 한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찾을 수 있었던 것. 그 기사는 모친을 파출소에 모셔다 주었고, 파출소에서는 고맙게도 모친에게 따끈한 설렁탕을 한 그릇 대접해줬다. 이들의 친절 덕분에 모친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일을 겪고 나자 택시 운전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더 이상 경쟁과 갈등만 가득한 무간지옥이 아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연화세계였다. 자신에게 큰 피해를 입힌 친구에 대한 미움까지도 사라졌다.
그렇게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봤다.
“먹고 사느라 앞만 보고 뛰며 보낸 세월 속에 어느덧 내 나이가 쉰 살이 넘었더군요. 그제야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봤습니다. 제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지요. 해를 끼친 이들은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었지만, 도움 준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저는 다른 이들의 도움 속에서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들에게 딱히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을 밟고 올라서고, 속이기나 하지 않았나 싶더군요.”
이런 작은 깨달음 속에 그가 선택한 것이 ‘회향하는 삶’이었다. 승객에 대한 친절은 기본,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업어서 아파트 5층까지 모시는 등 서비스를 아끼지 않았다. 또 사정이 딱한 노인 승객에 대해서는 택시요금조차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내겠다고 하면 1000원만 받았단다.
선행을 베풀기는 장애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하루는 월남전에서 두 팔을 잃은, 같은 나이 또래의 장애인을 태웠다. 그 승객은 주머니에서 요금을 꺼내가라 말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이 누렸던 경제적인 안락은 바로 그 승객과 같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희생 위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며, 타인과 나는 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뜬 그는 지난해 아름다운재단의 1% 나눔운동을 만나면서 체계적인 회향의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기부란 돈 많은 사람들이 실컷 쓰고 남은 돈으로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요. 한 달에 100만원도 벌지 못하는 저로서는 저와 거리가 먼 남의 얘기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 나눔운동은 그 같은 부담을 허물어뜨렸습니다.”
그 후로 김씨는 하루 수입의 1%를 꼬박꼬박 모금함에 집어넣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자신의 인생역정과 나눔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파랑새>를 펴냈다. 나눔을 통해 세상이 더욱 밝아지리라는 확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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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기사란 것이 목숨 걸고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적고, 사람대접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다보니 좌절 끝에 선택하는 인생막장으로 인식되고 있어요. 하지만 달리 보면 승객에 봉사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지요.”
이제 김씨는 아름다운재단의 ‘나눔의 택시’에도 동참할 계획이다. 뜻을 함께 하는 동료 기사들과 함께 친절한 서비스와 적극적인 봉사활동에 나서며, 나눔 문화 전파에도 앞장서게 된다.
“인생은 단막극이 아니며, 위기가 곧 기회”라는 자신의 믿음을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삶으로써 보여주는 김형권씨. 택시 운전을 통해 나눔의 기쁨을 실천하는 그는 오늘도 승객들을 태우고 ‘나눔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