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33. 조선시대 ⑧
시간이 지날수록 차는 생활 전반에 걸쳐 깊이 파고들게 된다. 의약서적은 말할 것도 없고 한자 학습교재나 사서류에까지 차에 관한 글들이 실린다. 주희에게서 주창되어 유교적 의례 속에 자리 잡은 차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는 서민생활에도 영향을 주었으니 이제까지는 주로 의약이나 건강을 위해 쓰이던 차가 제의 속으로 자리 잡게 되며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가 된다.
퇴계나 율곡 등의 대가들도 차를 즐겼으며, 가례(家禮)에 필수적인 품목으로 등장했다. 선비들의 차는 공식적인 다례 이외에도 계회(契會) 등에서 사랑받았다. 선가(禪家)의 차생활도 융성하지는 못했으나 종전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잦은 사화 등의 정변으로 경화된 유교적 이론들이 다른 종교나 정파들을 용인하지 못해서 불교에 대해서도 계속 규제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계속해서 차인들이 차 이론서(茶理論書)를 쓰고, 자기문화(瓷器文化)도 의흥(宜興)을 중심으로 자사다기(紫沙茶器) 생산이 본격화되어 명장(名匠)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① <훈몽자회>는 1527년 최세진이 만든 한자학습서로, 3360여자의 훈(訓)과 간단한 내용을 적은 책이다. 그 안에 차와 찻그릇에 관한 글자가 여러군데 나온다.
② 이행(1478~1534): 호는 용재(容齋). 중국에 다녀온 차인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찬진했다.
③ 정관대사(1533~1609): 법휘는 일선(一禪). 서산대사에게 삭발출가했다. 대둔사에서 일생을 보낸 다승(茶僧)으로 여러 편의 다시가 전한다.
④ 최연(1503~1549):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다시 <음다(飮茶)>에는 당시의 음다풍속이 들어있다.
⑤ 이이(1536~1584): 율곡은 우참찬, 판돈령부사를 지냈으며 중국에 다녀와서 차를 더욱 애용했다. <격몽요결>에서 ‘유식(侑食) 후 진다(進茶)한다’고 기록했다.
⑥ 권문해가 쓴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사서다. 고려와 조선의 차 이름(孺茶, 智異茶, 曹溪茶, 腦原茶)이 나온다.
⑦ 전반적인 시대의 대세이기는 했으나 사찰의 정비와 승려의 환속이 국가시책으로 이루어지면서 사찰의 차 생산량이 감소되었다.
⑧ 홍섬(150$~1585): 명상(名相)으로 차를 즐겨 다시도 전한다.
⑨ 고염(1527~1603): 명대 희곡작가로 ‘준생팔전’을 썼으며 그 내용에 차에 관한 것이 여럿 나온다.
⑩ 허차서: 명대 차인으로 <다소(茶疏)> 4700여자를 써서 다학의 깊이를 더했다.
⑪ 호문환: <다집>을 쓰고 ‘고기구명(古器具名)’ 등을 남겼다.
⑫ 서발: <다고>에 무이차에 관해 쓰고, <채단명별기>에서 ‘명담(茗譚, 송대차)’에 관해 썼다.
정영: 명대인으로 <다보>를 썼다.
왕문: 명대 화가로 ‘호구명완기창도(虎丘茗碗旗槍圖)’가 있다.
풍시가: <다록>을 썼다.
왕상진: <다보>와 <광군방보>를 썼다.
⑬ 시대빈: 명대 도공 시붕의 아들로 후에 의흥의 명장이 됐다. 처음엔 큰 작품을 즐겨 만들다가 후에 작은 다기로 바꾸어 명품들을 남겼다.
⑭ 장겸덕: <다경>을 남겼다.
<한국>
1527 <훈몽자회(訓蒙字會)> ①
약방 설치(중추부)-약재무역
@ 구봉령(具鳳齡)이 <다경>을 읽다
1532 이행(李荇)의 귀양 ②
1533 정관대사(靜觀大師) 출생 ③
@ 최연(崔演)의 다시 ④
1536 이이(李珥)의 출생 ⑤
1537 명의 사신이 오다
@ <대동운부군옥> ⑥
1538 사찰혁파 ⑦
1539 전라 승려 3000을 군적에 옮김
<신증동국여지승람> 찬진
@ 홍섬(洪暹)의 활동 ⑧
<중국>
1527 고염(高廉)의 출생 ⑨
@ 허차서(許次紓)의 활동 ⑩
@ 호문환(胡文煥)의 활동 ⑪
@ 서발, 정영, 왕문, 풍시가, 왕상진 ⑫
@ 시대빈(時大彬)의 활동 ⑬
장겸덕(張謙德)의 활동 ⑭
<일본>
리휴(利休)가 어린 나이로 차 모임을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