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인가 일주일 용맹정진기간 중에 있었던 일이다. 그 때의 모든 산중 대중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열외 없이 의무적으로 정진에 참석토록 산중청규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시퍼런 시절에도 예외는 있었다. 정진대중을 외호하는 원주스님은 합법적으로 빠진다.
한참 정진의 열기로 가득한 어느 날 방장스님은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는 방자한(?) 스님을 발견했다. 즉시 불러서 세워놓고 따지듯이 물었다.
“니는 뭔데 용맹정진 안 하고 돌아다니노?”
(쭈빗쭈빗하며) “저어~ 원…주…입니다.”
“원주우~ ???”
그렇다고 해서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방장스님이 쏘듯이 한마디.
“원주는 중 아이가(아니냐)?”
내심 못마땅했지만 칼 같은 노장님도 눈만 한번 부라리고는 그냥 큰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날 밤 여느때처럼 삼경에 죽을 끓여 야참을 준비하느라고 한밤중에도 공양간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행자님들의 바쁜 손놀림 곁에는 분주한 원주스님의 잰걸음이 있다.
예로부터 절집에는 ‘범어사는 원주살림, 해인사는 회계살림’ 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원주와 회계가 절 살림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원주나 회계는 참으로 바쁜 자리다. 개성 강한 모든 산중 대중과 찾아오는 재가자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옛 어른들은 이런 경우를 ‘방석 따뜻할 겨를이 없다’고 표현하신다. 엉덩이가 늘 방석과 떨어져 있어 ‘좌복 따로 나 따로’ 이니 방석 위에는 먼지만 가득하다는 말이다.
열심히 정진하는 것을 ‘방석을 헤지게 한다’고 한다. 얼마나 앉았는지 방석이 다 닳아버렸다는 의미다.
그러다보니 원주는 특별한 근기가 아니면 수행과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기 마련이다. 대중과 더불어 정진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그것도 새벽이나 삼경 이후에 개인시간을 이용하여 정진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시간도 낮의 격무로 인한 피곤으로 등을 방바닥에 붙이는 것이 일상화되면 그야말로 ‘살림중’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선어록을 열람하다보면 원주는 ‘안목 없는 승려의 대명사’로 자주 등장한다. 언제나 궂은 일만 도맡아 하니 선문답 속에서도 못난 역할을 대리로 자처하는 진짜 ‘역경계 선지식’이기도 하다. 이를 알기에 선지식들은 원주를 향해 자비로운 법문을 자주자주 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조주 스님의 유명한 ‘끽다거’도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주스님을 위한 법문이다. 원주가 후원 살림을 하느라고 법문조차 들을 여가가 없다보니 그를 위해 일대일 법문을 한 것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납자는 원주스님을 위하여 등장한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다 알고 있는 흔한 이야기이지만 그 전말은 이러하다.
조주 스님에게 어떤 납자가 찾아오자 물었다.
“자네는 예전에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예.”
“차 한 잔 하게.”
조금 있다가 한 선객이 선사를 찾아왔다.
“일찍이 여기에 온 일이 있었는가?”
“아니오, 없습니다. 처음입니다.”
“차 한 잔 하게.”
그러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원주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당연히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경우에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그 원주는 진짜 맹물이 틀림없다.
“어찌하여 큰스님께서는 온 적이 있다는 사람에게도 ‘차나 마시라’고 하고, 온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차나 마시라’고 하십니까?”
조주 선사께서 속으로 빙그레 웃는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이놈은 살림살이에만 매몰된 맹탕은 아니구나’ 하고 기특해 하실 것 같다.
“원주! 자네도 차 한 잔 하게.”
그런데 여기서 이 말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한 소식을 해야 뭔가 제대로 짜여진 완성된 선문답이 될 텐데 미완성으로 끝나버린다. 불행하게도 〈조주어록〉속에서 ‘그래서 그 순간 원주는 눈이 활짝 열렸다’라는 구절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거기서 끝이다.
참 서운하다. 그 한 마디에 바로 눈이 밝아지는 원주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일속에서도 수행을 게을리 않는 조사선 진면목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천황도오(天皇道悟) 선사도 임종시까지 원주를 위한 법문을 아끼지 않았다. 늘 절에서 뒤치다꺼리 만 하는 그를 위한 자비심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변함이 없었다.
도오 선사는 평소에 늘 ‘상쾌하고 즐겁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런데 임종할 무렵 병이 들어 누워서는 ‘괴롭다’는 말을 연달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원주를 불러 말했다.
“원주야! 괴롭구나. 참으로 괴롭구나. 염라대왕이 날 잡으러 온다.”
그러자 원주스님이 의아해하며 곁으로 다가와서 가만히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평소에는 항상 ‘상쾌하다, 즐겁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시더니 지금은 왜 ‘괴롭다’고 하십니까?”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선사가 한마디로 매조졌다.
“그래! 너 말 한번 제대로 잘 했다. 그렇다면 한마디 해 보거라. ‘상쾌하다, 즐겁다’라고 말하던 그 때가 옳은가? ‘괴롭다’고 하는 지금이 옳은가?”
이럴 경우 뭔가 한 마디 시원하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불행히도 ‘원주는 그만 말문이 꽉 막혀 버렸다’ 라고 마무리를 짓고 있다. 이 고구정녕한 마지막 법문마저 무위로 돌아갔으니 이것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아무리 마지막으로 간절한 법문을 해도 내가 안목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도 미완성 선문답이 되어버렸다.
선어록 곳곳에서 원주의 엉성한 모습을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원주라는 특정 개인이나 소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 속에서 공부가 병행되지 않는 ‘일을 위한 일을 하는 모든 스님들’, 다시 말하면 조사선 정신을 저버리는 모든 수행자의 대명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나저나 선가에 등장하는 최악의 원주는 단하천연 선사가 만행하면서 만난 그 원주일 것이다.
절 살림 아낀다고 불도 때지 않는 냉방에 단하천연 선사를 재우다가 나무로 만든 부처님마저 장작으로 뽀개지게 한 것이다. 땔감이 되어버린 그 불상을 바라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그 순간에 원주의 눈썹이 다 빠져 버렸다'고 묘사돼 있다.
객 대접을 엉망으로 한 과보로 법당의 부처님까지 태워버렸으니 뒤로 나자빠질 일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살림도 공부도 ‘별로’인 0점짜리 원주의 표상이다.
육긍대부가 선주 땅의 관찰사로 있을 때 남전 스님이 열반했다는 부고를 받고는 절에 들어가 재를 지내다가 갑자기 껄껄대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원주스님이 그에게 말했다.
“돌아가신 스님과 대부와는 사제지간인데 어찌하여 통곡하지 않습니까?”
웃음과 울음이라는 이분법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원주의 안목으로는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육긍대부는 이렇게 받아넘겼다.
“원주스님께서는 무슨 말이든지 여기에 대하여 한 마디 해보십시오. 그러면 제가 크게 곡(哭)을 하겠습니다.”
수행에는 승속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당나라 송나라 시절에는 모든 사람이 공부인이었다. 심지어 길거리 떡장수와 여염집 노파까지도 ‘아는 소리’를 하는 통에 출가자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육긍대부의 질문에 원주스님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사실 웃음 속에도 울음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어느 대중가수가 부른 “아하!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어쩌고 하는 노래가사가 여기에 대한 해답이 될 래나 모르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진짜 원주도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차례이다.
염관제안 선사 회상에서 후원의 살림만 하던 원주가 어느 날 임종을 맞게 되었다.
염라대왕이 그의 목숨을 가져가기 위하여 저승사자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저승사자에게 통 사정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대중시봉을 자청하여 후원의 소임을 신명 다해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공부할 겨를이 없었고 또 잠시 본분사를 놓쳤습니다. 제발 바라건대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이에 그 저승사자는 그 진지함에 감동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염라대왕께 아뢰어서 허락을 받는다면 7일 뒤에 다시 오겠지만 , 허락을 받지 못하면 바로 즉시 올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냥 돌아갔다.
일주일 유보 판정을 받았는지 곧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원주는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후 다시 발심하여 정말 간절함으로 열심히 화두를 참구하였다. 곧 선정삼매에 들었다.
약속한 7일 뒤에 저승사자가 나타났으나 선정에 빠져있는 그 원주스님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저승사자 정도의 안목으로는 찾아낼래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데리고갈래야 데리고 갈 방도가 없었다. 또 허탕이었다. 그 원주스님은 7일만에 생사 일대사를 해결해 버린 것이다.
“원주스님! 만세,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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