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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임은 곧 마음이다’를 부르짖고 마임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국내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54 ? 춘천마임축제 예술감독)씨. 30여년 이상을 마임에 공들인 그의 가상한 노력만큼 지금은 한국문화계에서 유진규가 마임이고, 마임이 곧 유진규가 됐다.
하지만 아직도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지 모르는 ‘마임’. 그건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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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에 왜 이런말이 있죠. ‘꽃은 말없이 피었다, 말없이 진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며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말처럼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그 속에 담긴 뜻이 분명이 있습니다. 마임은 바로 그 움직임만으로 메시지를 전해주는 예술이지요.”
유씨가 처음부터 마임이스트를 꿈꾼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는 동물을 좋아해 수의사가 되고 싶었다. 1970년 건국대 수의학과에 입학했지만 엄격한 학과 내부규율에 질려 공부에 관심을 잃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학교 연극반이었다. 그때부터 연극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급기야 학교에서 제적까지 당한 유씨는 1972년, 당시 전위적 실험 작품들로 유명했던 극단 ‘에저또’에 입단했다. 여기서 신체적인 표현을 중시한 극단의 특성 때문에 유씨는 자연스럽게 마임과 친해질 수 있었다. 특히 마임이라면 찰리 채플린 흉내가 전부였던 시절, 세계적인 마임이스트 롤프 샤레의 제자를 통해 본격적인 마임 수업을 받았다. 이후 1976년 ‘발가벗은 광대’ 로 마임 인생의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의 마임 인생에서 고비가 찾아왔다. 그토록 경멸했던 유신정권의 몰락으로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을 누린것도 잠시, 분노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공황상태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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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동안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무대에 선 것일까?, 이것 역시 한낱 포장하고 꾸민 작위적 행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등등. 이런 생각이 들자 1981년 보따리를 꾸려 객지인 춘천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소를 키우며 한동안 살았다. 그러던 중 공연기획자로 있는 친구를 통해 국내 마임계가 완전히 초토화 직전이란 말을 듣고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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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은 별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몸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마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것이 자신의 몸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몸이 사실은 많은 부분 통제 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새삼 자신스럽게 자신의 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에게 이렇게 몸과 마음이 결국은 하나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97년 춘천 마임축제 준비중 머리가 깨지는 듯한 두통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가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유씨는 수술도 하기 힘든 상태라는 의사의 진단을 듣는 순간 ‘이것은 단순한 육체의 질병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모든 인간 관계속에서 얽히고 설켜 이루어진 마음의 문제가 몸의 병을 불러 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지인의 소개로 지리산 실상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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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서 외부와 철처히 차단한 채 내 자신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죠. 내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니 내 병은 ‘인간’ 들과의 문제에서 비롯된 거란걸 깨닫게 되었죠. 꼬일대로 꼬인 인간들과의 업연의 실타래들 말이에요. 명상을 통해 그걸 푸는데 꼬박 두 달이 걸렸어요. 어느순간 내 안의 모든 것이 천천히 녹아 내리는 느낌이 들더군요.”
정말 육체의 병은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유씨가 절에서 나와 석달 뒤 병원을 다시 찾았더니 종양이 거짓말처럼 없어졌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명상 수행을 통해 마음의 병을 치료한 뒤 실상사를 내려와 그가 산사에서의 생활을 토대로 무대에 올린 것이 바로 대표작 ‘빈 손’이다. 이 작품은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빠져 나가며 텅 비어 있을때만이 새것이 들어 찰 수 있다는 불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산사에서의 생활을 통해 유씨의 연기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동작 자체가 단순해 진 것이다.
“그동안 제 마임은 화려함과 동작의 다양성만을 추구해 왔어요. 하지만 그건 정작 사물이나 우주의 실체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겉만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사람, 사물 등 제 마임 소재들의 본모습을 들여다보면 그저 단순하기 짝이 없어요. 그걸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제 동작 자체가 훨씬 단순해져야 겠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거죠.”
그는 요즘도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이면 춘천 옥천동 ‘마임의 집’에서 ‘빈 손’으로 무대에 선다’ 또 시민들과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마임강좌’도 열며 마임을 대중들과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 힘을 기울인다. 일반인들도 마임을 통해 자기가 갖고 있지만 미처 말이나 글에 의해서 눌려 있던 움직임의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을 것이라는 유씨는 지금 새 작품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구상중이다. 절반 가량 완성된 상태인데, 올해 안으로 관객들에게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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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몸이 안 좋으면 벌써 느낌이 팍 와요. 그러면 ‘아 마음에서부터 이상이 생겼구나’ 스스로 처방을 내리고 바로 명상에 들어갑니다. 자기전이나, 버스탈 때나 특히 공연전에는 반드시 명상을 합니다. 철저히 내 몸과 마음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묻히고 온 번뇌 찌꺼기들을 명상을 통해 털어내려 합니다. 그런 과정들이 쌓이다보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공연에 몰입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일까. 그의 마임에는 소리 없는 몸짓의 아우성을 통해 존재의 내면에 깃든 말을 전하는 선어록급 언어들이 무수히 박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