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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8일 국민대에서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나말여초 승탑 탑신 신장상 연구’를 발표한 강삼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왕실과 선사들이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사회적 배경과 승탑의 탑신부에 등장하는 신장상이 왕릉 조각인 능묘 십이지상과 유사한 점을 근거로 이 같이 주장했다.
강 학예사의 주장은 지방 선종사찰의 조형물이 중앙과 구별되는 지방색을 띠고 있다는 점만 강조되면서 간과돼오던 중앙과 지방 선종 사이의 연관성을 새로이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신선한 관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강 학예사는 우선 왕실과 선사의 긴밀한 관계에 주목했다. 실상산문 개산조인 홍척 스님과 신라 흥덕왕, 희양산문 개산조 지증 스님과 경문왕, 성주산문 개산조 무염 스님과 경문·헌강왕 등은 서로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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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신라 경명왕은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탑 비문을 지었고, 태조 왕건은 진공 스님의 비문을 지었으며 고려 정종은 봉림산문 3대 옥룡사 경보 스님 입적시에 국공을 시켜 탑을 세우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승탑에 대한 왕실의 영향은 미술사적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강 학예사에 따르면 승탑 사천왕상은 능묘의 십이지상과 도상형식을 공유하고 있다. 갑옷 안에 입은 포의 넓은 소맷자락이나 지물을 든 손모양이나 다리를 휘돌아감으며 내려오는 천의 모습 등 승탑 사천왕상의 표현은 능묘 십이지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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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승탑 사천왕상의 소맷자락과 관련해 강 학예사는 “거의 모든 십이지상 복식에는 이러한 소매가 표현돼 있으나, 사천왕상이 표현되는 탑이나 석등, 사리기 등에는 이 같은 소매가 한 점도 발견되지 않는다”며 “승탑은 호족세력의 영향하에 조성된 지방예술이라기보다는 중앙양식인 왕실 계통의 작품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