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조사 자료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폐사지는 대략 3천 2백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세상에 알려져 세인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1백여곳 뿐. 나머지 대부분은 아직도 역사의 뒤뜰에 방치된 채 무심한 뭇 풀벌레들의 서식지가 되었거나 세월의 그루터기가 되어 삭아가고 있다.
시인인 장지현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48)은 4년간, 기다리는 이 없는 이 절터들을 수시로 출입하며 그 곳에서 잃어버린 한국불교의 과거를 통해 오늘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간의 결실이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다. 제목은 <잊혀진 가람 탐험>이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현대불교신문에 연재됐던 내용을 묶은 이 책에는 양양 진전사지, 여주 고달사지, 충주 미륵대원지, 서산 보원사지, 익산 미륵사지, 제주 법화사지 등 남한 9개도에 흩어져 있는 35곳 폐사지가 소개돼 있다.
지은이는 전국의 폐사지 가운데 원주 정산리 거돈사지를 대표적인 절터로 손꼽는다. 거돈사지에 들어서면 수령 1천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3층석탑(보물 제 750호), 화강석 불대좌 등이 조화를 이뤄 거돈사지 특유의 애잔한 모습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력(寺歷)을 증언해 주는 각종 석물들이 절터 왼쪽에 즐비하게 누워있어 분명 폐사지이기는 하지만 황량한 느낌보다는 꽉 채워진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여느 폐사지를 답사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고 술회한다.
4백년만에 위용을 드러낸 조선 국찰 양주 회암사지도 지은이의 발길을 한동안 머무르게 한 곳이다. 현재 발굴작업이 한창인 회암사지의 순례는 그 명성이 국찰인 만큼 한두 번의 발걸음으로 끝내기는 벅차다고 한다. 특히 회암사는 이성계가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말년에 권력의 무상함을 되새기며 위로받던 곳이다. 그래서 회암사터에는 청기와를 비롯해 발·잔·합과 같은 분청사기와 청화·철화백자 등 왕실의 살림살이가 깨지고 부서진 채 지하 곳곳에 탑을 이루고 있다고 지은이는 묘사한다.
폐사지 순례를 하며 지은이가 수시로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곳도 있다. 합천의 영암사지이다.
그 이유를 지은이는 영암사지야말로 황매화 같이 신령한 힘과 기상이 분출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암사지의 탐험은 정교하게 쌓아올린 석축과 그 위의 석조물들, 그리고 동편 조사당 터암수 2개의 귀부(보물 제 489호)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살피는 것이 적당할 것이라고 소개한다.
특히 영암사지 건축에 깃든 옛 사람들의 예술적 미학은 금당의 석단 4면에 돋을새김한 여덟 마리 사자, 불대좌 기초석의 팔부중상, 금당 계단 소맷돌의 가릉빈가 조각상 등 절터 구석구석 어느 한 곳 빼놓을 곳 없이 섬세하고 감미롭다고 극찬한다.
최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 국토 곳곳에 매장돼 있는 역사의 성보들을 캐낸 지은이의 땀방울들이 책 곳곳에 녹아 있어 편안히 앉아서 책장을 쉽게 넘기는 독자의 입장이 오히려 미안할 정도다.
지은이와 함께 현장을 답사해 폐사지 모습을 생생하게 앵글에 담아낸 고영배 현대불교 차장의 사진들도 글의 이해를 쉽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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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가람 탐험
글 장지현 | 사진 고영배
여시아문 | 2만3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