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에 도착한 혜초는 780년 4월5일에 ‘건원보리사’ 라는 절에다 짐을 풀었다. 이 것은 자신이 직접 쓴 기록<4>-『至唐建中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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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사문에게 오대산은 스승인 불공삼장을 비롯한 많은 도반들과의 인연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왜냐하면 불공삼장은 황제의 후원으로 금각사(金閣寺)를 건립하고 함광(含光)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보내 나라와 황실의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772년에는 대흥선사에 거대한 ‘문수각(文殊閣)’을 지었는데, 이 때 대종황제가 직접 각주(閣主)가 되고 귀비, 한왕, 공주 등이 시주를 하였다는 것을 보면 금각사는 문수신앙을 고취하기 위한 대흥선사의 오대산 분원 역할을 하였다. 두 사찰이 이렇게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불공의 직계 제자들의 오대산행이 빈번했으리라는 추정을 한결 설득력이 있게 만든다. 그런 때 아마도, 혜초는 스승을 수행하여 도반들과 함께 오대산을 들락거렸을 것이기에, 그렇기에, 인생의 회향을 앞둔 노쇠한 혜초사문의 발길은 누가 잡아끄는 것이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오대산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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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수보살-금강지-불공삼장-금각사-함광-혜초를 연결하면 혜초가 오대산으로 들어온 정황이 쉽게 그려진다. 혜초사문은 자기의 생을 회향하기 위해서, 자기 영혼을 주존인 문수에게 의탁하기 위해서 동문 사형제들이 머물고 있는 오대산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혜초가 적어도 20일 간 머물며 약칭「대교왕경」을 번역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 서문까지 직접 쓴 장소인 건원보리사에 대하여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혜초사문이 육신을 벗고 입적에 들었을 개연성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80(?)을 바라보는 노쇠한 혜초사문이 교파가 다른 사원으로 주석처를 옮겼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정황에다 근거를 둔 가설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불공삼장의 문중서열로 볼 때 ‘ 6대제자’란 높은 배분으로 당연히 그 뒷산 어디쯤에서 다비식까지 치러졌을 것이며 또한 근처 어디에 소박한 부도탑 하나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우리나라 불교사상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의 하나임이 분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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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느 날 문득 머리 속을 스쳐가는 강한 의문에서 내 사유방법에 어떤 전환점을 맞게 되었는데, 그것은 티베트불교에서 수백 년 동안 동굴 속에서 잠자고 있는 매장경전을 찾아내는 신비스런 능력을 가진 라마승 ‘뙤르텐’<9>과 같은 그런 종류의 영감(靈感)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이 기점으로 그 뒤 근거자료도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나는 이제 한 가설(假說)을 제기하기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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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설’은 바로 ‘건원(乾元)’이란 단어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다섯 자로 된 사원명이 드문 사실에서 증폭되어 불공삼장과 금각사에 관한 주변 자료들에서 보완되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건원’이란 바로 당나라 8대 황제인 숙종(肅宗)의 연호(年號)이기에 건원보리사는 고유명사라기보다 건원황제- 즉 숙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라는 상징적 보통명사라고 볼 수도 있다는데서 이 가설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사례로 쓰인 다른 경우가 이를 뒷받침한다. 불공삼장의 행장을 묶은「불공…표제집(不空…表制集)」<>에는 “오마자사(吳摩子寺)라는 사원의 이름을 ‘대력법화지사(大歷法花之寺)’로 바꾸게 했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여기서 ‘대력’은 ‘건원’과 마찬가지로, 숙종의 뒤를 이은 대종황제의 연호이다. 그러니까 <대력+법화+지+사>로 풀이되는데, 여기서 대력은 황제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니 “대종(代宗)의 법화가 날리는 절” 이라는 뜻이 된다.
이런 실례는 더 있다. 역시 같은 자료에 ‘대성금각보응진국사(大聖金閣寶應鎭國寺)’이란 긴 이름의 사원명이 보이는데, 여기서 ‘보응’은 역시 ‘대력’과 같이 대종황제의 연호이다. 그리고 ‘진국사’는 국찰(國刹)을 의미하니 <대성+금각+보응+진국+사>가 되어 바로 “성상(聖上)<10> 대종황제의 나라를 평안케 하고자하는 기원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보응진국사’라는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황제가 원력을 세워 지은 절인 ‘금각사’의 별칭이 되는 셈이다.
봉건왕조 시대에서는 임금의 호칭을 직접 사용하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그렇기에 편년체적 기술이나 황제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주로 연호를 사용하였다. 예를 몇 개 들면 현종은-’개원성상황제(開元聖上皇帝)‘로, 숙종은-‘건원광천문무효감황제(乾元光天文武孝感皇帝)’로, 대종은-‘보응원성문무황제(寶應元聖文武皇帝)’로 불리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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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근거들을 종합하면 ‘건원’의 의미는 대종황제의 효심과 호국불교의 의지와 연결되었다고 보여 지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건원보리사를 -<건원+보리+지+사>- 로 나누어 해석하여도 ‘보리’란 단어가 문맥상 발목을 잡는다. 일반적으로 범어(Bodhi)의 한역으로 ‘보제(菩提)’라고 적지만 흔히 ‘보뎨’ 또는 ‘보리’라 읽는 이 말은 사전적으로는 도,지,각(道,智,覺)으로 번역되어 “깨달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나 과정”을 뜻한다. 그리고 그밖에도 지명, 인명 등으로 폭넓게 쓰이는, 가장 보편화된 인도불교적인 단어이다.
혜초가 말년에 오대산에서 번역을 탈고하고 서문까지 쓴 약칭「대교왕경」은 이전에 학계에서는 금강지의 번역으로 분류되었으나 근간의「신대흥선사지」에는 어엿하게 ‘석혜초찬(釋慧超撰)’이라고 바뀌었을 만큼 비중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길지 않은 이 서문에 혜초는 무려 9번이나 ‘보리’라는 단어를 다양한 뜻으로 사용했다. 물론 지나친 아전인수식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혜초가 이 단어를 특별히 즐겨 사용했다 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보리’가 다양한 용례로 쓰였다면, 건원보리사는 넓게 해석해서 “당나라의 무궁함과 건원황제의 명복을 기원하는 기원도량”이라는, 숙종황제에 대한 번역가 혜초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대종황제의 효성이 담긴 비공식 단어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필자는 혜초와 숙종과의 특별한 인연관계- 숙종의 특별한 유지를 받았다던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던가 하는 등-까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숙종이 ‘안록산의 난’ 와중에 촉(蜀)나라로 몽진중인 현종(玄宗)의 자리를 양위 받아 757년, 전쟁터에서 제위에 올랐을 때의 주변상황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었다. 이 때 황제에 오른 숙종은 반란군에게서 장안을 수복할 계획을 세울 때, 피난을 가지 않고 장안 대흥선사에 남아있는 금강지(金剛智)와 몇 년 동안 반란군의 동태를 적은 밀지(密旨)를 비밀리에 주고받았다.
그래서 반란이 평정된 후 금강지는 그 공으로 후한 상을 받고 또한 숙종은 금강지에게서 관정수계(灌頂受戒)까지 받고 불교에 귀의했다. 이렇게 건원, 즉 숙종황제는 혜초의 문중과는 인연이 깊은 처지였기에, 그 와중에 혜초가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여 황제의 특별한 은총을 받지나 않았을까하는 좀 무리한 추론을 해보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만약 ‘건원보리사’란 단어가 한 사원의 정식명칭이외에도 황제를 높이고 혜초사문 자신을 낮추는 존칭과 겸양의 의미로 쓰인 별칭이라면, 그럼 건원보리사는 어느 절을 가리키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마지막으로 남게 된다.
그 질문에 대답은 이미 여러 번 되풀이 되었듯이 바로 금각사이다. 이어지는 결론은 이렇다. 건원보리사는 바로 오대산 남대봉 아래 현재까지 건재한, 혜초의 문중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던, ‘금각사’란 절의 다른 이름이거나 또는 금각사에 속해 있던 ‘12개 보살원락(院落)’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금각사란 큰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곳일 것이다. 원래 큰 절에는 인근에 몇몇 암자가 붙어있기 마련이니까… 물론 이런 개연성적인 ‘가설’은 건원보리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실존했다고 증명되는 순간에 수명이 다하는 한시적인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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