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7 (음)
> 종합 > 기획·연재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불…“사랑입니다”
‘사랑의 이불 할매’ 화랑의 집 원장 정억순



정억순 원장의 손에서는 천과 바늘이 떠나지 않는다.
주머니에 든 송곳은 반드시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는 말처럼 세상엔 숨길 수도 없고 또 아무리 숨겨두려 해도 주책없이 드러나 버리는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가슴에 든 사랑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 5월 20일 왜관의 시골 마을 ‘화랑의 집’에서 만난 정억순(66·대각행) 원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사랑의 이불 할매’로 통하는 정 원장. 스무 살 무렵, 맨 처음 이불을 만들어 거지에게 들려 보낸 후 40여 년 동안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지은 이불과 베개 1만 5천여 채를 전국의 소년소녀가장, 선방, 고아원, 양로원, 소방서, 경찰서 등에 보내오고 있다.
춥고 배고팠던 피난 시절, 먹을 것만큼이나 귀한 것이 이불이었다. ‘황소 한 마리 일궈야 이불 한 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불이 귀했던 시절,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이불을 만들어 없는 사람들한테 나눠주자’고 결심했다. 앞뒤 없이 너무나 간절하게 차올랐던 그 한 생각이 그대로 정 원장의 일생을 결정짓는 원력이 되었다.

엄마가 만들어놓은 이불을 몰래 훔쳐서 남한테 갖다 주었을 정도로 남 돕는 일에 타고났던 정 원장은 어머니를 닮아 바느질 솜씨가 좋았다. 직접 이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이불 보시가 시작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 원장의 이불보시는 계속 되지 못했다. 이십대 후반, 평생의 원이었던 이불 보시는 물론 생살 같은 자식을 떼어 놓아야 하는 피치 못할 현실에 부딪친 것이다. 어릴 적부터 ‘스님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지만 ‘내가 돈 벌어 가난한 사람 도울 것’이라는 고집으로 한사코 부정해왔던 정 원장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이 팔공산 부처님이었다.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팔공산 자락에 소문이 날 정도로 바위틈에서 경전을 읽고, 참선, 염불을 하며 3년을 지냈다. 간첩이라는 신고를 받아 경찰이 찾아올 정도로 지독한 시간을 보냈던 시절을 회고하며 정 원장은 눈물을 보였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밤이 되면 바위에 기대서서 잠깐 눈을 붙였죠. 목숨을 떼어 놓고 부처님께 시험을 치르는 심경이었죠. 부처님 법이 있다면 평생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뿐이었어요.”



젊은 시절의 일기 메모는 힘겨울 때 힘이 된다.


그 혹독한 시험 끝에 세상에 다시 내려와 정 원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초와 향을 사들고 천년이 넘은 미륵불이 있는 곳을 일일이 참배한 후 쌀 15가마로 떡을 만들어 대구지역에 있는 고아원 51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떡을 나눠 준 것이었다.

“쌀 석 되로 석 달 사는데 부처님 전에 올려진 떡이 그렇게 먹고 싶었어요. 그래도 그때는 그것 내려서 먹을 생각을 못했을 정도로 바보였어요.” 자신이 먹고 싶었던 떡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시작으로 세상에 돌아왔지만 자식들과 함께 사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다. 자식들을 향한 사랑을 가슴에 묻은 정 원장의 눈엔 외롭고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엄마 없이 자라야 하는 자신의 아들과 딸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전국의 소년소녀가장과 고아원에 수도 없는 이불을 보냈고 틈틈이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불 호청을 꿰맬 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이불마다 16개의 고리를 달아 호청을 갈아 끼우기 쉽도록 배려한 정 원장의 이불 만들기는 말 그대로 고행이었다. 일반 이불 열채보다 더 많은 손길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그 이불을 만들기 위해 재봉틀 앞에 앉아 내려오지 않았다. 허리가 탈이 났다.

그러나 아이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최고급 원단, 최고급 솜을 고집한 탓에 턱없이 모자라는 재정은 자신이 운영하는 혼수 용품점에서 나온 수익금 전부를 털어 넣어 충당했다. 이불을 만들면 만들수록 이불을 보내야 할 곳은 늘어났다. 격무에 시달리는 소방서, 경찰서는 물론이고 가난한 교회까지 마다하지 않고 이불을 보냈다. 재정이 바닥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늘 쪼들리다 보니 스스로를 위해 인색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입고 싶은 거 다 입고 자고 싶은 거 다 자면서 어떻게 남을 돕느냐?”며 웃어버리고 마는 정 원장이지만 최근까지 골다공증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 지금도 택시비 아끼느라 한참 떨어진 동네 어귀까지 걸어가 버스를 탄다.

정 원장이 만드는 이불은 세상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사랑의 온도를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이불 줄 곳이 너무 많아 먹고 싶은 거 아예 잊고 산다는 정 원장. “좋으니까 하는 일이지 억지로 나처럼 살려면 힘들어서 못산다”는 정 원장의 말에서 고단함이 묻어난다. 그러나 바늘을 들고 이불 앞에만 앉으면 세상 모든 시름을 잊는다. 이불이 평생의 화두였고 호신불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정 원장의 이불 예찬은 결코 헛말이 아니다.

이불을 사랑하며 평생 이불과 함께 살아 온‘사랑의 이불 할매’는 청룡봉사상을 탄 유명 인사가 돼 50여 년 만에 고향인 왜관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살림을 쪼개 부처님을 조성하고, 곡식을 타작하면 제일 먼저 스님께 공양 올렸을 정도로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를 기리는 도량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사재를 털어 불교문화체험 공간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굳은살이 생겨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돌아다니며 풀을 뽑고 나무를 심고 돌보는 사이,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골다공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약을 먹지 않고는 조절되지 않던 콜레스테롤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90평 규모의 ‘화랑의 집’은 ‘세상 속에 부처님의 교리가 살아 숨쉬게 해야 한다’는 정 원장의 오랜 숙원이 담긴 불사로 우리나라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를 키우겠다는 정 원장의 간절한 기도가 기둥이 되고 벽이 되어 우뚝 솟은 도량이다.

“세상에 왔다가 그냥 갈 순 없잖아요. 옛날 스님들이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것처럼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 불교가 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인재를 양성시키는 일, 이제 나한테 남은 마지막 원입니다.”
글=천미희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
2005-05-28 오전 10:42:00
 
한마디
일생을 나아닌 남을위해서.부처님의 법 을펼치는 끝없는 정진을.높게칭찬 합니다
(2005-05-30 오전 8:35:42)
39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