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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진역 화엄경소>의 서문, 그 두 번째 단락을 점검하겠습니다.
(2) 이렇게 무장 무애한 법(法)이 법계법문의 술(術)이 되니 그곳은 제 보살이 드는 바요, 삼세 제불이 나오는 바이며, 이승(二乘) 사과(四果)가 귀먹고 눈멀어지는 곳이고, 범부 하사(下士)들의 멋모른 웃음거리가 되는 소이이다.
이 법문에 든 사람은 한 생각에 능히 무변 삼세를 나툴 수 있고, 시방세계를 온통 한 티끌속에 넣을 수 있으리니, 이같은 도술을 어찌 가히 사의(思議)할 수 있겠는가.
(2) 如是無障無石疑之法, 乃作法界法門之術, 諸大菩薩之所入也, 三世諸佛之所出也, 二乘四果之聾盲, 凡夫下士之所笑驚. 若人得入是法門者, 卽能不過一念普現無邊三世, 復以十方世界 咸入一微塵內. 斯等道術 豈可思議.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년전에 작고하신 김지견 선생님은 식사를 마치시고는 늘, “이제 좀 뭣이 보이네”라는 감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거기 촌철의 진실이 있습니다. 주머니에 지갑이 두둑할 때와 빈털터리일 때, 우리가 느끼는 조바심과 행복지수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이 생기면,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느긋해 하는데, 이는 누구나 공감하는 바일 것입니다. 지갑의 두께는 신체에 아무런 직접적 연관을 갖지 않지만, 그것이 심리적 포만감을 주고, 그것은 또 육체적 안정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역시 삼계(三界)는 유식(唯識)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만든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잘 먹어야 합니다. 병을 고치려 해도, 다이어트를 하려고 해도, 마음을 손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 그것은 선가의 표현을 빌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법계로 들어서는 비결 또한 마음을 잘 먹는데 있습니다. 마음을 잘 먹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그것은 곧바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이끌 것이니, 그때 문득 법계가 열리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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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大乘)의 얼굴(體)은 만상의 거죽을 벗어나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 얼굴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니고, 아무나 그 세계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원효는 그래서 곧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다”고 덧붙이는 것입니다. 대승 혹은 법계의 이 역설의 미묘(微妙)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세상 속에 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같은 지구 위나, 정신적으로는 서로 다른 수준을 경험하고 있는, 그리고 이 두 세계가 모순 없이 서로 공존하고 있는 이 오묘함에 불교 언설의 비밀이 있습니다.
육도, 인간들이 사는 서로 다른 세상 풍경
허니, 우리 모두 같은 세상에서 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의 대가 스즈키는 <선의 입문>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와 내가 차를 마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세계같지만, 우리는 각자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육도(六途), 여섯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짐승처럼 축생계에, 어떤 이는 늘 이빨을 드러내며 아수라에, 어떤 이는 늘 허기진 탐욕으로 아귀처럼, 어떤 이는 울고 웃는 인간세에, 어떤 이는 축복 속에 신선처럼 삽니다. 아, 제발 지옥에서 사는 것은 면하도록 기도합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이 물리적 세계를 받아들일 것.’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지금 여기의 이 사바밖에는 없으니, 너는 네게 주어진 삶을 떠나려는 유혹과 부단히 싸워야 한다. 2) 그 속에서 다만 우리의 정신적 삶을 업그레이드하고 혁신시켜 나가자.
그런데, 그런데, 화엄은 이런 인간적 노력들을 일거에 헌신짝처럼 밟고 지나갑니다. 이 가르침이 얼마나 파격적이냐 하면, “이승(二乘) 사과(四果)가 귀먹고 눈멀어지는 곳이고, 범부 하사(下士)들의 멋모른 웃음거리가 된다”고 적을 정도입니다. 화엄이 대체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하길래 그러느냐고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화엄은 지금까지의 불교와는 달리, “사바와 법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벗어나야할 사바도 없고, 들어서야할 법계도 달리 없다고 말합니다. 화엄은 모든 인간적 문제의 원천 무효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선언 앞에서 우리는 흡사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립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묻지 말라니
화엄의 취지를 좀 더 부연해 볼까요. 모든 ‘언설’이나 ‘교훈’은 좀 어려운 말로, ‘수행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지금 어느 한 군데가 불완전하며, 무엇인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말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이에게 “얘야, 밥 먹어라”라는 권유에서, T.V. 토론에서처럼 자기주장을 펼치는 마당, 나아가 지나간 과거를 읽고 해석하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원리입니다. 최근의 독도문제와 정치권의 과거사 공방을 보면 그 점이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양식은 다르지만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노력들”입니다. 그런데, 화엄은 이 모든 인간적 활동들을 웃어 넘깁니다. 화엄은 놀랍게도 “세상이 이미 완전하고, 우리가 이룰 것은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화엄은 과격하게도,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다만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네가 이 세상과 다투는 것을 그치면, 세상은 고요해 질 것이니, 그때 진정 세상이 이미, 우리가 손댈 필요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육조 혜능이 오랜 칩거를 마치고 나설 때, 어느 절에 두 스님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두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 스님은 “깃발이 흔들린다”고 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흔들린다”고 맞서는데, 육조 스님이 이렇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희들 마음이 흔들린 것일 뿐.”
세상이 불완전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린 탓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이 평온해집니다. 그렇다면 불교조차, 그 다시 없이 높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가르침조차, 평지에 일으킨 풍파 아니면 긁어 부스럼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에 발끈 주먹을 쥐고 흔듭니다. “그럼, 이 혼탁하고 불행한 세상을 그냥 두잔 말이냐.” 이것은 불교를 향한 근본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번 고대 조성택 교수님의 강의에 초대되었다가 어떤 학생으로부터 이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답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방의 선지식들은 이 화두에 무어라고 답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