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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숨겨진 예술혼 발굴
[도반의 향기]동국예술기획 박동국 대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문화재의 무대를 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초야에 묻혀 몇몇 제자들에게 조심스레 자신의
동국예술기획 박동국 대표.
혼을 전해온 예인들의 경우는 더욱더 그랬다. 전통예술 복원, 전통의 세계화 등의 말은 때만 되면 터지는 구호지만, 정작 일반인들이 전통예술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돼 있었다.

박동국(동국예술기획 대표ㆍ48)씨가 없었더라면 지금도 강선영 선생의 태평무를 화보로 배우고, 박송희 선생의 흥보가를 테이프로만 익혀야 했을지도 모른다. ‘전통문화계의 홀로 아리랑’이라 불리는 박씨는 서양문화에 밀려 대중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전통의 춤꾼 및 소리꾼을 위한 무대를 16년째 기획해오고 있다.

그는 후미진 지방에 사는 탓에 공연할 기회가 적었던 ‘끼가 넘치는 예인’들, 현세에 예술혼을 오롯이 전하지 못한 채 연로해 가는 ‘살아있는 문화재’들을 위해 ‘한국의 명인명무전(名人名舞展)’을 쉼없이 열어왔다. 우리나라 공연사에서 ‘전통예술’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10년이 넘는 정기 공연을 지속해 온 경우는 거의 없다. ‘돈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은 길을 힘들게 열었고, 그 길을 16년째 소리없이 다져오고 있다. “외면당한 채 죽어가는 전통문화를 그대로 둘 수 없었어요. 소리와 춤은 7살 이후 제 삶의 전부였거든요. 제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없어 시작한 거에요. 그것이 이렇게 거창해질 줄은 몰랐지요.”

그는 7살 무렵 고향인 전남 함평의 우시장에서 유랑극단의 창극을 우연히 접하면서 전통의 소리와 몸짓에 눈을 떴다. 무대세트는 허름했지만, 장구와 대금 그리고 아쟁으로 내던 효과음악이 어찌나 놀랍고 신기했던지 그는 창극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리곤 그 낯선 문화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주말이면 광주 시립 국악원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몇 십리 길을 걷고 뛰었다. 고등학교때는 독학으로 배운 대금의 질좋은 재료로 꼽히는 쌍골죽을 찾아 부산의 범어사 근처까지 오갈 정도였다.

“그렇게 전국을 누비며 예인들의 곰삭은 소리와 몸짓을 20여 년 접하다보니 조바심이 더욱더 커지더군요. 이 빛나는 멋과 흥을 담은 문화가 그대로 사장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살려낼 방도는 없는지 참말로 처절하게 고민했죠. 그러다 꾸리게 된 것이 동국예술기획입니다.”

89년 국내 유일의 국악 전문 기획사 ‘동국예술기획’을 열게된 그는 ‘한국의 명인명무전’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리게 된다. 그간 필드에서 봐왔던 ‘명성보다는 춤사위가 뛰어난 지방의 예인들’을 섭외해 공연을 기획했다. 출연자 섭외는 물론이고 포스터 제작, 홍보까지 모두 혼자서 해결하는 1인 기획사였지만 신명이 나서 하는 일이라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한강 이남에서 벌어지는 공연에는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발로 뛰고 가슴으로 느끼는 공연감상에 익숙했던 그였기에, 공연에 대한 구상과 아이디어도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준비한 첫 공연. 국립국악원 역사이래 처음으로 관객들이 줄을 서서 공연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문화예술계의 극찬이 이어졌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러나 성황리에 끝낸 첫 공연 이후에도 그는 줄곧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좌석이 꽉꽉 들어차더라도 표를 팔아 남긴 돈으로 출연료와 대관료를 비롯한 부대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전통문화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미미한 탓에 연이은 공연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줄 단체도 사람도 쉽게 따라붙지 못했다.

동국예술기획 박동국 대표.
“클래식이나 외국 스타들의 공연에는 수천 만 원, 수억 원씩 쏟아붓는 기업들이 우리 공연에는 단돈 100만원 내놓는 것도 아까워하더라고요. 수년 전 문화체육부에서는 재정적인 지원은커녕 후원명칭 사용하는 것도 거절당했었죠.”

스폰서 하나 붙지 않는 공연을 강행하면서 없던 재산은 거덜이 나고 빚은 눈동이처럼 불어났다. 돈을 제때 갚지 못해 300만원을 빌려 9000만원을 돌려줘야 했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었다. 어렵사리 얻게 된 후원사도 말썽이었다. 94년 한ㆍ중ㆍ일 명인명무전 공연 때는 기업들이 후원하기로 했던 1억원이 미납되는 바람에 살고 있던 집을 팔 수밖에 없었다. 공연을 취소할까도 생각했지만, 전통문화를 팔아 국제적인 사기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98년경 북경 공연을 앞두고는 중국측에서 구두로 합의한 약속을 깨는 바람에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살을 결심했지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는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역시 문제는 사람이었다. 사재를 털고 빚을 감당하면서까지 명인명무전을 끌어가는 그를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한양대 법대를 뛰쳐나와 추계예술대 국악과에 몸을 담은 그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집안에 쟁이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예술을 한다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연섭외를 위해 어려운 발걸음을 해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 어려웠다. 예술을 날로 배운 새파랗게 어린놈이 무슨 무대를 기획하냐는 무시였다.

그러나 그 같은 무대가 한 해 두 해 이어지면서 차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후원업체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의 외로운 노력을 지지하고 인정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매방, 박동진 선생 같은 원로 문화재들도 선뜻 섭외에 응할 만큼 공연의 가치는 높아졌다.

뿐만 아니다. 오랜 기간 같은 주제의 공연을 기획하면서 그가 발굴해낸 국악계의 숨은 진주들도 적지 않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 예능보유자 엄옥자 선생은 “박대표가 아니었더라면 내 춤은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외롭게 전승되던 솔로 춤사위인 통영 승전무는 양지로 나오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런 면에서 판소리 대가들 역시 “박동국 대표는 업고 다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 그가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명인명무전과 함께 신예들을 발굴하기 위한 ‘한국의 소리와 몸짓’ 공연도 함께 올리기 시작했다. 전통의 올곧은 계승도 중요하지만 창조적인 변형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또한 올해부터는 아시아권에 머물렀던 공연을 구미로 확대할 계획이다. 오는 8월 LA(8월 27일 Ford Amphitheatre)와 워싱턴 DC(8월 30일 Geoge Washingtion University-Lisner Auditorium)에서 무대가 예정돼 있다. 그러나 그의 꿈을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통문화전용센터 건립도 추진할 생각입니다. 현재 5만여 평의 땅을 준비해 놓은 상태입니다. 650여석의 전통예술 전용극장을 비롯해, 전통의상ㆍ전통악기 박물관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하드웨어 마련이 소프트웨어 발전을 이끌 수도 있을 겁니다.”
글=강신재 사진=박재완 기자 |
2005-05-22 오후 5:27:00
 
한마디
팔라스 당신은 이분께 그런 말할큼의 인격인지가 심히 의심스럽소이다.
(2005-07-09 오후 4:50:06)
63
다 좋은데 입이나 덜 거칠고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아니고 안 보여질때도 인격적인 모습이였으면 더 좋겠구만......
(2005-06-30 오후 2: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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