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총림 칠전선원장 지허 스님이 을유년 하안거 결제 법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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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법어 전문.
을유년 하안거 결제 법문
태고총림 선암사 칠전선원 선원장 지허(指墟)대선사
(법상에 올라)
양구(良久)후에
방하만사서(放下萬事瑞) 수도조주관(須度趙州關)
삼도백불회(參到百不會) 편시로단단(便是露團團)
온갖 일 다 놓아버리고
반드시 조주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니
참구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경지에 이르면
여기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느니라.
직절여사거(直截如斯去) 수유파의단(須臾破疑團)
납승가중사(衲僧家中事) 여시내안한(如是乃安閑)
곧 바로 이와 같이 가다보면
잠깐사이에 의심덩어리가 부서지니
중이 사는 집안일은
이 같아야 편안하고 한가로우니라.
이는 우리 종단의 종조님께서 어떻게 안거를 해야 참된 안거인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견성 못한 이가 있거든 스스로를 돌아보고 을유년 여름은 내 일생에 없는 샘치고 초심행자를 벗어나지 못한 이 병납(病納)과 함께 우리 종조님 말씀대로 때와 장소 구별 말고 각기 처한 환경 속에서 아무것도 구애받지 말고 한번 철저하게 참구해 봅시다.
편안한 것은 한가로워야 합니다. 한가로운 것은 아무 일이 없어야 합니다. 스님에게 편안하냐고 묻는 것은 안거를 잘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 편안함은 조사관(祖師關)을 타파한 후에 일 없는 한가함에서 오는 편안함입니다. 이 편안함이 아니고는 우리 절집안은 어디에도 편안함이나 한가함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편안함이 극락이요, 성인이며 편안함이 없으면 지옥이고 중생입니다. 중생의 스승이기에 스님이라 부릅니다. 스님이라는 칭호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꼭 편안함을 얻어야 하고 얻은 편안함으로 중생들에게 편안함을 얻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종단의 종조이신 태고보우 큰스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보면서 올 하안거에 반드시 태고조사 스님처럼 편안하고 한가로워 집시다.
종조스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일은 다 허망한 것이 사실이니 다 놓아버리라 하였고, 그런 후에 반드시 옛 조사 조주스님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조주스님이 여러 가지 공안을 내셨지만 그 중에 구자무불성(狗者無佛性) 화두가 대표적입니다. 이를 무자(無字)화두라고 합니다. 시방삼세가 전烕한 자리에서 무(無)자밖에 없는 것을 여기서는 참구라 합니다. 이렇게 전후좌우도 없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도 없이 있는 것이라고는 무자(無字)밖에 없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경지라 합니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정체가 들어납니다. 또 정체가 들어난 게 다가 아니며 여기서 속지 말고 계속 참구하여 나가라 하셨습니다. 바라지도 말고 기다리지도 말고 오직 참구만하다 보면 찰라 간에 화두덩어리 무자덩어리가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편안하다함은 부서져 나가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스님들은 다 같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살려고 중이 되었습니다. 편안하고 한가로움을 잘못 아는 이가 있을지 몰라서 태고종조 큰스님께서 몸으로 보이셨고, 뒷날을 당부하셨기에 태고종이 생겼습니다. 태고종은 편안하고 한가로운 종조큰스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스님들의 모임입니다. 거듭 말하자면 편안하고 한가롭다는 것은 이 몸둥이의 말이 아닙니다. 마음의 편함과 한가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편하고 한가하면 마음은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이 몸뚱이는 필연적으로 생노병사의 고통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몸뚱이의 주인은 오로지 마음뿐입니다. 주인이 편해야 따르는 육신이 편합니다.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 길은 경절문이라는 참선이 있고 미타관이라는 염불문(念佛門)이 있으며 원돈문이라는 간경(看經)이 있습니다. 이 문에 들어야 생사를 해탈합니다. 생사를 해탈해야 편안이 있고 한가함이 있습니다. 생사를 해탈하고자 하는 분을 스님이라 합니다.
우리 조사님들이 특히 우리 종조이신 태고보우 스님께서 그 중에서 가장 빠른 길은 참선문이라 하시고 참선문에 들으셨습니다. 또 참선문으로 견성오도(見成悟道)를 하셨기에 이를 권하셨습니다.
이 병납(病納) 또한 우리 종조의 이 뜻을 따라 태고종도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혹 종조 큰스님의 말씀을 등한시 여긴 일이 있는 분이 있다면 이번 하안거를 스스로 살펴 눈여겨 보냅시다.
조주일일(趙州一日) 재불전상(在佛殿上)하야
견문원례불(見文遠禮佛)하고 이주장타일하(以柱杖打一下)하니
원운(遠云)하되 예불(禮佛)은 야시호사(也是好事)니다.
사운(師云)하되 호사(好事)도 불여무(不如無)니라.
조주 스님이 어느 날 법당 부처님께 예불 드리는
문원이라는 중을 보고 주장자를 들어 한번 때리니
문원이 말하기를 예불 드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주스님이 말씀하시되, 좋은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 하셨습니다.
예불 드리는 스님을 주장자로 왜 때리셨는지 예불은 좋은 일이라 하니, 좋은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 이 무슨 도리입니까?
이 병납이 한번 이르고 법문을 마칩니다.
운쇄조계문(雲鎻曹溪門)
좌구태고봉(坐久太古峯)
산심무거래(山深無去來)
관찰불공공(觀察不空空)
구름이 조계문을 열쇄 잠구었기에
태고봉에 오래 앉아 있었네.
산은 깊어 오고가는 것이 없으니
비어버림아닌 비어버림을 깊이 보고 살폈네.
(하좌(下座))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