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싶은데
질문: 저는 우연히 스님에 관한 책을 보고서 감명을 받아 선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는 중에 스님의 말씀대로 공자리에 되돌려놓는 작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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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나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깨우치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해요. 빨리 해야겠다 하면 빨리 하겠다는 대로 가슴이 답답하게 돼 있어요. 또 느긋하면 느긋한 대로 게으른 생각이 들어가서 답답하구요. 그러니까 양면을 다 놓으란 말입니다. 물 흐르는 그대로, 물 흘러가는 것같이 그렇게 살란 얘기지요. 어느 게 들어와도 물러서지 말고 더러운 게 들어와서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도 하지 말구요. 흙물이든 고름물이든 핏물이든 오물이든 모든 걸 들어오는 대로 그냥 집어삼킬 수 있다면, 바다와 같이 집어삼켜라 이거예요. 그러면 편안해요. 악도 집어 삼키고 선도 집어삼킨다면 그렇게 자유스러울 수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그 가운데 자유가 있다는 이런 말이에요.
이거를 다 놓는다면, 욕심도 놓고 모든 걸 다 놓는다면, 놓으라고 해서 아주 그걸 하지 말라는 게 아니거든요. 수억만 냥을 쓴다 하더라도 그걸 놓고 써라 이거예요. 내가 쓴 게 아니고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올바로 써야 된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그걸 홀연히 다 밝게 하시려면 화두를 쥔다는 생각 말고, 놓는다 생각도 말고, 좌선을 한다 생각도 말고, 좌선을 안 한다,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마시고 우리가 일상생활 하는 것이 그대로 내 주인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니 아프게 들어오는 것도 주인만이 낫게 할 수 있어요. 주인이 하라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 그대로 주인의 심부름이에요. 내고 들이고 하는 것이 다 주인으로 인해서 나간다면 여러분이 병고에 휘달릴 것도 별로 없습니다. 왜? 30%는 병원에 가서 할 수 있는 거라면 하고, 70%는 자기가 거기에다 충당해서 나간다면 걱정할 게 뭐 있겠어요? 내가 죽을 때 되면 죽겠지요. 안 그래요? 옷 벗을 때 되면 벗겠지요.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니깐 고통을 그렇게 안 받고도 갈 수 있지 않느냐. 공부하는 데 실험할 때는 거기에서 별의별 게 다 나와서 어떠한 뭐가 닥쳐도, 거기다 되입력하는 그 자세로써 나간다면 여러분은 얼마 안 있어서 내면에서 올바로 볼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말을 배우고 지식을 배우고 학식을 배우고 모든 걸 다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한 가지의 그 뜻을 찾지 못하고 계발 못하는 이런 문제들이 많으니 이런 게 옳다 저런 게 옳다, 이걸 빨리 해야겠다하는 욕심은 좀 버렸으면 좋겠어요. 이런 것도 놔야 미지수의 우주 세계의 그 하나에 내가 더불어 같이 들 수가 있는 거지, 아니 내가 요게 틀리고 요건 좋다고 하면서 내 마음이 그래 가지고 몸뚱이가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이럭하다 보면 그 미지수의 세계에 내가 한데 합쳐져서 어떻게 들어가 보겠습니까? 마음이 움죽거리면 몸도 움죽거리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과거를 갔다 오고 그러는데 삼천 년이 걸린다, 이러는 게 한 찰나예요. 삼천 년을 만약에 거리를 두고 그렇게 한다면, 아니 삼천억이라고 하더라도 그 미세한 티끌 수와 같이 그렇게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는 거거든요. 그런 것도 한생각이면 그냥 다 맞붙어 버려요. 그래서 과거를 전부 알게 되고 미래를 알게 되고 현실을 알게 되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깐 내가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도 말고 더디 해야겠다는 생각도 말고 오직 믿는 거! 자기 참, 수없는 억겁을 거치면서 자기를 형성시킨 자기 장본인을 진짜로 믿어라 이겁니다.
회사를 개업하려는데
질문: 항상 높으신 법문에 감사합니다. 이번에 회사를 개업하려고 하는데 고사는 지내야 하는 것인지요. 만일 지낸다면 준비와 절차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스님의 항상 건강하심을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어떤 회사를 하더라도 화목재를 한 달에 두 번을 지내든지 한 번을 지내든지 지내세요. 예전에 고사라고 하고 모두 지냈는데 그게 고사가 아니에요. 화목재라는 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나 기계의 마음들이나, 보이지 않은 마음들이나 보이는 마음들이나 둘이 아니기 때문에 같이 모여서 떡이라도 썰어 놓고 음료수나 과일이라도 좀 사다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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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그때를 지내보셨으니깐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층 더 합니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을 자기 그릇에서만 생각할 게 아니라 한번 그 사람들 그릇을 좇아가 주는 것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하면 자식도 그렇게 따라갈 것이고, 부모가 그렇지 못하면 자식도 그렇지 못하게 따라갈 것입니다. 그게 자식이 아니라 즉, 자기입니다. 자기예요. 그런데 자기가 모자란다고 하면 뒤를 돌아다보고 앞을 내다보고 이끌어야 하는데, 자기는 돌아다보지 않고 그냥 그 차원에서 막 내뜨린다 말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일가친척이라도 그렇고, 친구라도 그렇고, 사업을 한다면 직원이라도 그렇고, 자기가 하는 대로 그 차원에 따라서 모든 것을 이끌어줄 수 있는 마음, 한생각을 내는 데 잘 내게끔 이끌어주는 선배가 돼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게 바로 홍보입니다. 가정으로부터 말입니다. 그렇게 한생각을 잘 내는 게 아주 중요하죠.
어떤 분이 공장을 하는데 공장에서 자꾸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겁니다. 직원들이 손가락도 부러지고 손목도 다치고 그래서 이익이 남질 않고 자꾸 그런 데로 돈이 빠지고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다고 하길래 새로 들여놓은 기계도 그렇고 직원들도 그렇고 모두가 한마음으로서 한 주인이 모든 거를 운영을 하는 거라고 한번 진짜로 믿고 생각해 보라고 그랬던지 진짜로 믿고 기계도 사람도 둘이 아니게 둥글리면서 화목재도 지내면서 점점 잘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감사재라는 것을 화목재라고 생각하라 그랬습니다. 초하루나 보름에 떡을 해서는, 떡도 요즘은 맛이 없어요. 먹을 게 너무 많아서요. 그러니까 기증떡 보풀보풀한 거 한 서너 조각 크게 하고 물 한 그릇 떠 놓고 향과 초 켜 놓고선, 그저 우리가 한마음으로서 기계 하나도 빠짐없이, 사람의 마음도 하나도 빠지지 않고 한마음으로서 구성되게 하라고 감사재를 지내고 화목하게 그 자리에 앉아서 같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이런다면 껄끄러웠던 마음도 녹아지고 화합이 됨으로써 운영이 잘돼 나갈 수 있단 말입니다, 모두 내 일같이 하니까요. 그리고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넉넉히 베풀고 말입니다. 또 없으면 없는 대로 없다는 거를 전부 알게 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조금 해서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을 좀 보태 주고 이렇게 해 나가 보라고 그랬더니 지금 3년이 됐는데 말입니다, 얼마나 많이 불어났는지 모릅니다. 단합이 돼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고사입니까? 화목재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마음이나 똑같아요. 하다못해 기계에도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사람이나 말하고 그러는 줄 알지만 하다못해 풀포기도 말 안 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하물며 공장 안에 기계가 돌아가고 그러는데, 또 사람이 출납을 하고 모두 가지각색으로 다 분야마다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정히 안 된다고 할 때 화목재로 지내라고 일러 줍니다.
어떨 때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이 ‘스님이 그런 거 지내란 말도 없더니 왜 저렇게 지내라고 하나?’ 하기도 합니다만 얼마나 여러분이 뚝뚝하고, 얼마나 잔재미가 없고, 얼마나 화목을 도모하지 못하면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음료수라도 사다 놓든지 같이 화합을 도모하는 얘기를 나누고 어떡하든지 같이 해 보자고, 어떡하든지 같이 해서 같이 먹고 살자고 이렇게 화목하게 해 나간다면 어느 누구가 그 마음을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그럴지언대 아마 귀신의 마음도 그래서 한마음이 돼 줄 겁니다. 그러하니 이것은 말을 붙이기에 달려 있는데 붙이기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해야만 됩니다. 크게 사업하는 사람이나 또 작게 상업을 하는 사람이나 여러 사람을 데리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바깥에서만이 그런 게 아니라 가정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가 한 해 농사를 잘못 지으면 추수해 들일 게 없어요. 그렇듯이 내 자식들의 농사도 잘 지어야 하고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과도 추수를 해서 잘 거둬들이려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안팎으로 노력을 하시라 이겁니다.
계율과 깨달음에 대해서
질문: 다른 스님들은 계율에 대해서 중요시 말씀을 하시고 그러시는데 스님께선 계율에 대해서 특별히 말씀하신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법문 중에서 조금씩 말씀하시고 그랬는데, 계율과 깨달음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한번 여쭤 보고 싶습니다.
답변: 계율이라 하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계율이 있는 것입니다마는,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벌써 상식과 교양, 교육을 다 받고 잘못된 거 잘된 거 알게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벌써 근본적으로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말은 안 해도 좋지만, 사회에서 사시는 분들은 사회에 계율이 있고 질서가 있고 상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스님들이 사는 도량에는, 도량은 여러분이 사는 데나 우리 스님들이 사는 도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도량하면 전 우주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절 도량에서 사는 스님들도 스님들대로 계율이 있고 그렇지마는, 그 계율을 무시하고 공부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 계율도 거기에 근본적으로 밸런스가 맞아야지 만약에 맞지 않는다면 그건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근본적으로 상식을 알기 때문에 내가 절에 들어가면 절의 계율을 지켜야 하고, 들에 나가면 들에 나가는 대로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계율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라는 겁니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회에서도 어느 회사엘 들어가거나 한다면 거기는 계율이 없습니까? 모든 게 계율은 제가끔 받고 있기 때문에 계율이 따로따로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우리는 지금 계율을 지키고 살고 있는 겁니다. 차를 피한다, 차 속에 들어가지 말라니깐 우리가 안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죽을까 봐 안 들어가요. 그건 저절로 그렇게 돼 있죠? 차가 오는데도 무조건 내가 차 속으로 들어가질 않죠? 차를 피해서 내가 갑니다. 그것이 바로 계율이에요, 근본적인. 집안에서도 그럽니다. 더러운 것은 좀더 훔치고 깨끗하게 씻고 다듬어 놓는 것도 계율이에요. 모든 것이 하나서부터 열까지 계율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 사는 것이 계율에 의해서 올바르게 살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행한다 이 소립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돼 있어요. 여러분더러 저기 길에 나가서 강도질을 한번 하라고 그래도 못해요. 안 그래요?
계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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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식탐을 가지지 마시라고 한 것도 그것도 역시 우리가 공부를 하려면 외로워야 하고 고독해야 하고 배고파야 하고 어따 기댈 데도 없을 때에 자기의 생명수를 홀연히 맛을 보는 거지, 배부르고 호화롭고 안락하고, 마음이 이래서는 일심으로서 그 철벽을 뚫을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있어도 바로 자기 것이 아니고 먹을 게 많아도 자기 것이 아니고 호화로워도 자기 게 아니고, 모든 게 자기 것만은 아니다 이겁니다. 일체 같이 돌아가고 있으니 언짢아할 것도 없고 또 슬퍼할 것도 없고 좋아할 것도 없이 항상 마음을 중도에다 두고 중심을 지키면서 해 나갈 수 있는 그 공부가 필요한 거죠.
그러고 계율 자체가 말입니다, 계율이라 하면 이런 게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몇 시부터 공양을 끝내고, 또는 아침에 몇 시서부터 예불을 올리면 그다음에 법당에 앉아서 좌선을 하고 참선한다 이런 계율, 또는 소임을 맡은 사람들의 짜임새가 똑똑 떨어지게 돼 있는 것을 계율이라고, 이름해서 계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승려라면, 승려라도 그렇고 여러분도 아침에 일어나시면 으레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 씻고 여자는 밥한다.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뭣을 하고 내 몸에 있는 모든 것을 처리하고 몇 시면 벌써 어디까지 간다. 회사에 나간다. 장사를 한다. 이런 시간을 맞춰서 나가는 것도 역시 그것도 이름 붙이다 보면 계율이죠. 그리고 나가서도 올바로 해야만 그게 계율이죠. 우리가 올바로 못하는데 어떻게 계율이 됩니까? 그것은 상식적인 얘깁니다, 근본적으로. 그런데 시간을 요땐 요거를 하고 요때는 요거를 하고, 요렇게 짜여 놓는 거를 계율이라고 이름해서 부른다는 겁니다.
그렇듯이 여러분이 입산한 분들은 아니지만 여러분 가정에서 계율을 지키면서 철두철명하게 해 나가셔야 될 겁니다. 그것도 참선이니깐요. 어느 거 하나 참선 아닌 게 없습니다. 똥도 옆으로 누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고, 똑바로 누면 쏙 똥이 들어가니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죠. 무슨 ‘계율을 지키랬으니까 난 똥을 올바로 눠야겠다.’ 이럽니까? 똥 눌 때도 그냥 저절로 ‘한데다 누면 안 되지. 삐뚤어지면 다른 데 묻으니까. 그리고 가래침을 뱉으면 이거 더러우니까.’ 이렇게 스스로서 계율을 지키는 겁니다.
이게 전부 우리가 교육이나 또는 상식, 교양을 가지고 그대로 계율을 지키고 나가는데, 인간 자체가 그래서 첨단을 넘고도 남음이 있다고 봅니다. 이건 벌써 재력을 아주 충만하게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앉아서 우주를 그냥 굴릴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한 굴릴 수가 있는 능력을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계율 같은 것은 거기에 포함해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말입니다.
불성ㆍ법성ㆍ무에 대해서
질문: 불교학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경전에 불성과 법성, 그다음에 무에 대해서 나오는데 법성과 불성과 무와의 차이점이 무엇이고 그것이 무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답변: 무(無)라는 것은 일체만물이 모두가 고정됨이 없이, 여러분이 이 사람 만날 때 저 사람 만날 때 고정됨이 없이 바뀌어 돌아가듯이 가고 옴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만남도 고정됨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對)가 없는 게 무죠.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누구든지 어떤 걸 만날 때 어떤 걸 볼 때 내가 봤다고 할 수 없는 게 무다 이거예요. 그게 무심이다 이겁니다. 이 세상을 통틀어 봐도 우주 전체가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무!
불성이라는 것은 그대로 저 풀 한 포기도 남김없이 전체 시공이 없이 돌아가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불성은 누구나가 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음을 내는 것은 법성이고 본래 가지고 있는 거는 불성이다 이겁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거는 무다 이거야. 이것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끝없는 진리,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진리, 찰나찰나 나투는 도리 이것이 한데 합쳐지면 그것이 무입니다. 어떤 걸 나라고 세울 수가 없어요. 내가 제일이라고 세울 수가 없어요. 그것이 무다 이겁니다. 우리가 생각을 내지 않으면 몸뚱이가 움죽거릴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바로 내가 지금 일을 하고 있고 약속을 했으니까 빨리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을 일으켜야만이 내 몸이 움죽거리고 가거든요. 그래서 법성이다 이겁니다. 불성은 또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말하는 것이고. 법성은 사람이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무로 전체가 같이 돌아가지만은 한 생각을 냈을 때는 법성이죠. 한 생각을 냈을 때.
그래서 무 법 불, 이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의 돌아가는 거조차도 무다 이거죠. 하나로 돌아가는 거. 보는 것도 오늘 여러 사람 봤죠. 고정됨이 없어요. 듣는 것들도. 그러니까 모든 게 무예요.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무. 찰나의 무. 찰나 생활이거든. 시공을 초월해서 찰나 생활이기 때문에 무야, 전체가. 불 법 승 전체 무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는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 무의 세계에 유의 세계를 같이 거둬지고 100%를 찰나찰나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이 길을 인도하는 거다 이겁니다.
그래서 자세히 얘기를 하자면 무라는 이치는 우리가 끊임없이 찰나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 여여하게. 여러분의 불성이 본래 있고 마음을 내는 법성이 그대로 있고 움죽거리는 생활이 그대로 있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렇게 있기 때문에 그대로 찰나찰나 자기가 보는 것도 하나만 고정되게 보는 게 없고, 만나는 것도 고정되게 한 사람만 만나는 게 없고, 먹는 것도 한 가지만 먹는 게 없고 또는 만나는 것도, 그런데 말하는 것도 또는 한마디만 고정되게 하는 게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찰나찰나 이렇게 돌아가는 거죠. 여러분이 애가 “아빠!” 하고 들어왔을 때 금방 아버지가 되고, 부인을 만났을 때 금방 남편이 되고, 부모를 만났을 땐 금방 자식이 돼요. 이렇게 화해서 돌아가는 것이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바로 무(無)라고 했던 거예요. 깨닫지 않고는 참 어려운 문제죠.
지금 저기 물이 흘러 돌고 있습니다. 물이 흘러 돌고 있는 데 끊임없습니다. 그 물은 여기서 흐르나 저기서 흐르나 똑같이 흘러서 제자리로 항상 모입니다. 또 위로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그 물을 만약에 산으로 비유한다면 높은 산이 있고 낮은 산이 있습니다. 높은 산이 있기 때문에 낮은 산이 있고 낮은 산이 없다면 높은 산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흘러 도는 이 자체가 바로 우리가 무의 세계, 유의 세계와 같이 우리가 죽어서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우린 항상 살아 있는 겁니다. 저 물이 흘러서 돌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무뿌리가 살아 있는 그거는 설명을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항상 여러분은 그냥 저 물이 흘러 돌듯이 도는 거, 산이 높고 낮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낮은 게 있기 때문에 높은 게 있고 높은 게 있기 때문에 낮은 게 있는 것이지, 어떻게 낮은 게 없는데 높아 보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을, 찰나찰나 돌아가는 것을, 흘러가는 물이 끊어짐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무’라고 한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나를 증득해서 내가 낳기 이전을 발견해서 물리가 터지고 지혜가 생기고 모든 걸 통달한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다 없는 것이죠. 이것이 무예요. 왜 없다고 하느냐. 번연히 이렇게 앉았는데 왜 없다고 하느냐. 여러분의 근본 자체는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근본 자체가 살아 있고 근본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 있고 마음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움죽거릴 수 있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다 무다. 그래서 이거를 통달하기 전에는 모른다 이겁니다, 모두. 내가 나기 이전과 나와 결부돼서 깨달아야만이 그 도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거는 경설로 할 수도 없고, 정법이 어떤 것이고 사법이 어떤 것이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이렇게 따진다면 여러분이 각자 나를 깨달을 수가 없어요.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이 계시니까 여러분 마음속에서 마음을 내고 바깥으로 움죽거리고 이러시죠? 만약에 여러분이 안 계시다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 관계상 그게 고정된 게 없이 돌아가는 이 자체 진리가 공했다 이 소립니다. 이거를 알아들으려면, 이거를 알려면 깨달아야만 안다 이겁니다. 그거는 말을 해 가지고 아는 게 아니니까. 이게 그 법이예요. 그게 법이예요. 무도 되고 법성도 되고 불성도 되고, 불성이 없으면 그렇게 받을 수가 없고 먹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가르쳐 줘도 모르는 것은, 깨닫지 못해서 모르는 거야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고 내가 낳기 이전 과거의 나를 발견해야만이 현재의 모든 걸 똑똑히 보고 모든 걸 똑똑히 처리하고 똑똑히 이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고 일체제불과 한마음이 돼서 한마음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거죠. 일체제불의 마음은 내 한마음이요, 일체제불의 법은 내 한마음의 법이고 생활이고, 그렇지 않아요? 악행을 저지르는 것도 선행을 저지르는 것도 내 한마음입니다. 부처 마음이 따로 있고 중생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처 중생은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높고 낮음도 둘이 아니요, 동서가 둘이 아니요, 여자 남자가 둘이 아니요, 일체 중생이 둘이 아니다 이거예요. 이렇게 둘이 아닌 도리를 알려면 나를 깨닫지 않고는 절대로 그 도리를 증득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증득하고 나를 발견해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만이 그 도리를 환하게 통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