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29. 조선시대 ④
이 시기에 오면 일부 차의 산지가 정비되어 공물로도 바쳤으나, 아직도 중앙에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다세(茶稅)가 차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김종직은 지방의 목민관으로 그 실상을 보고 혁신적인 타결책을 찾아낸다. 실제로 차 농사를 짓지 않는 농민들이 세금을 내는 어려움을 보고 촌로들에게 물어 엄천사 대밭 속에서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여 다원을 일으켜 세금을 내도록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안도 여러 곳으로 전파되지 못하고 차 농사는 점점 쇠퇴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도 외국의 사신 접대나 공물에는 차가 빠지는 일이 없었고 국가의 행사에도 차는 언제나 있었다. 선가(禪家)에서는 차가 미약해졌으나 선비들 사이에는 꾸준히 이어졌다.
중국은 차의 무역이 여의치 않고 국내 소비량도 줄어 군인의 봉급을 차로 대신 준 일도 있었다. 일본은 강호 시대가 열렸고 성을 축조하고 동산류(東山流)를 위시한 차의 맥이 계승됐으며 사원의 차도 확대되었다.
① 신숙주는 태종부터 성종가지 6대를 봉사한 학자로 일본과 중국을 다녀온 차인이었다. 그의 <해동제국기>에는 일본의 음다풍습을 기록했다.
② 6월 이후 사신 접대 다례가 다섯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③ 박팽년이 내시, 다방에 관해 상소를 올렸다.
④ 특별한 행사 때가 아니면서 왕이 신하들과 차를 마신 일은 드물었다.
⑤ 남효온(1454~1492): 호는 추강(秋江). 김시습과 교유하며 노장사상에 심취했으며 차를 매개로 더욱 가깝게 지냈다. 다시 ‘은당자다(銀鐺煮茶)’가 유명하다.
조위(1454~1503): 호는 매계(梅鷄). 성종의 총애를 받은 점필 문하의 차인으로 차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다시 ‘가섭암’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⑥ 이때 쯤에는 제다기술이 발전해 명에 보내는 공물에 차를 보낼 만큼 품질이 좋았다.
⑦ 김수동(1457~1512): 호는 만보당(晩保堂).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인이다. 예서를 잘 쓴 차인으로 ‘야좌유음(夜坐有吟)’에는 차겨루기 얘기도 나온다.
⑧ 정희량(1469~?): 호는 허암(虛庵). 무오사화 때 유배된 후 현허(玄虛)한 사상에 심취한 차인이다. 그의 ‘야좌전다(夜坐煎茶)’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다.
⑨ 진강: 명대인으로 어사가 되어 섬서지방을 둘러보고 <다마지(茶馬志)> 네 권을 썼다. 말과 차의 교역(茶馬貿易), 말을 기르고 거두는 일 등을 기록했다.
진정: 명대학자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양산묵담(兩山墨談)>에는 육안다(六安茶)에 과한 것도 있고, 서한시대에 차가 있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⑩ 소보(1460~1527): 명대 문인으로 호는 이천(二泉). 차를 즐겨 노승(老僧)과 품다(品茶)한 얘기들이 전한다.
<한국>
조선시대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①
1450 사신 접대 다례 수차례 열림 ②
다방에 관한 박팽년의 상소 ③
1452 주다례, 사신맞이 다례, 상회례 때 다례를 없애기로 함
1453 왕이 신하들과 음다 ④
대마도에 차를 보냄
계유정난
1454 남효온(南孝溫), 조위(曺偉)의 출생 ⑤
차산지 35개 지역 <계유정난>
1455 원의충(源義忠)이 사신으로 오다
대마도에 차를 보내다
1456 명(明)에 작설차 5말을 보냄 ⑥
@ 사신 맞이 다례가 거의 매년 있었다
1457 김수동(金壽童)의 출생 ⑦
1461 공물 대납 금지
1464 왕이 종묘에 가서 제를 올리다
1465 경상도 지리지(김종직)
1467 사옹방을 사옹원으로 개칭
1468 사신 맞이 다례와 주다례
1469 정희량(鄭希良)의 출생 ⑧
<중국>
명대
1451 관리와 군인 봉급을 찻잎으로 지급
@ 진강(陳講), 진정(陳霆)의 활동 ⑨
1460 소보(邵寶)의 출생 ⑩
<일본>
@ 대내소이(大內小二)의 송사(送使)
1457 강호성(江戶城) 축조
1460 각 지방의 절에 차를 바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