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의 전신인 명진학교가 개교한 것은 1906년 을사조약체결로 국운은 날로 쇠잔해 가는 시기였다. 이무렵 일본 사원건립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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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는 종단과 대학이 머리를 맞대고 학교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때로 한국전쟁의 혼란기 속에서도 국내최초 종합대학 승격, 최신 시설의 장충동 캠퍼스 조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국가나 종단, 대학모두 가난했지만 동국대를 중심으로 교육을 통한 불교의 중층의 원력에 불교계 전체가 한데 뭉쳤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60년대를 전후로 동국대의 시련이 시작된다. 비구ㆍ대처의 장기간에 걸친 분규는 결국 1962년 군정에 의해 5명의 관선이사가 파견되는 치욕을 겪게된다. 이 사건은 사실상 동국대가 3대 사학의 위상을 잃고 지금 같이 뒤쳐지게 된 첫 출발이 된다. 재단성격의 전국사찰대표가 참여하는 동국대운영평의회가 해체되고 사립학교법에 의한 재단 이사회가 들어서면서 학교법인 동국학원은 종단과 각 사찰들로부터 사실상 연결고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74~75년 중앙공무원교육원이던 현 혜화관의 인수 과정에서 동국대는 또다시 재단과 종단의 파국을 겪는다. 조계종이 강남 봉은사 부지 10만평과 맞바꾼 공무원연수원 건물을 동국대 캠퍼스 안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총무원과 재단은 돌이킬 수 없는 감정대립을 일으켰다.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된 이 사태로 동국대에 또 다시 관선이사가 파견되고 학교는 내리막을 걷게 된다. 관선이사 파견은 동국대와 인연이 없는 인사들과 비교육전문가들이 재단을 장악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종단의 방치속에 80년대 경주캠퍼스 건설과 의대부속병원 건립 등 이해 할 수 없는 대학운영의 실수를 거듭하면서 동국대의 교세는 위축되어만 갔다. 89년 이사장 진경 스님과 총장 지관 스님의 대립, 극렬했던 학원자주화투쟁에 부담을 느낀 정부의 학원 길들이기에 동국대는 또 다시 시련을 겪는다. 아직도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동국대 입시부정 파문은 불교와 동국대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입시부정 사태가 수습되면서 90년 동국대는 사실상 종단 정치의 그늘 속에 편입됐다. 녹원 스님이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종단의 구성은 종단정치의 권력구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형국으로 변질 됐다. 이후 종단의 정치권력이 변할 때 마다 동국대 재단은 덩달아 요동 쳤다. (<동국대학교90년지>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