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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발전으로 인격적인 신이나 도그마에 갇힌 종교의 입지는 좁아져 가고 있지만, 불교의 심오한 진리는 갈수록 빛을 더하고 있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이 간파한 바와 같이 불교는 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불교는 과학과 대화하며, 과학의 올바른 발전을 선도하는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부처님오신날 특집 ‘과학과 불교 특별좌담-과학의 시대 불교는 무엇인가’를 마련했다.
토론 참석자
◇박영준 교수(서울대 전기공학과)
◇우희종 교수(서울대 수의학과)
◇양형진 교수(고려대 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과)
사회
◇양형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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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 유물론에 기반한 근대과학은 자연과 인간을 대상화하면서 발달해왔다. 그 가운데 개인과 생태의 존립은 위기를 맞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은 직선적인 인과관계로 세계를 이해하는 이성에 근거한 과학의 한계 때문이다. 과학은 이 세계를 상생·관계·연기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한다. 불교와 과학을 논하는 것은 과학을 진정한 인간의 삶과 연계된 과학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박영준 : 어느 종교나 철학도 과학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과학시대이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과학적인 패러다임 안에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과학의 도움 없이 중생이 이해할 수 있게 불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양형진 : 과학을 통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과학이 도그마의 위험성이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가장 믿을 만한 체계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포교와 신행의 방법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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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불교와 과학의 관계를 본격 논의해보자. 불교와 과학이 유사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우희종 : 과학이 불교와 유사한 점은 인과를 따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학의 인과는 직선적인 반면 불교의 인과는 인드라망적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 혹은 방향성이 없는 총체적인 관계로 파악된다. 또 다른 점은 과학이 분석론적 환원론에 입각해 있다는 점이다. 환원론은 관계를 끊고 구성요소를 살피고, 구성요소를 미시적으로 더욱 파헤친다. 이에 반해 불교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관계로 이뤄진 것으로 파악한다. 서양의 분석적인 환원론 방식으로는 우리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전체적인 모습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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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과학이 발전하면서 불교와 소통할 수 있는 접경이 넓어졌다. 불교의 세계관과 과학의 이해가 상통할 수 있는 구조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우희종 : 지금 시스템 공학이나, 카오스 이론 등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은 서양과학의 이성적·유물론적 사고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를 불교용어로 바꾸면 사(事)에 해당하는데, 불교가 다루는 일부분에 해당한다. ‘사’는 불교와 과학의 공통된 요소로, 불교와 과학이 대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理)는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으로 남는다. 이 때문에 불교는 과학을 포함한다고 본다.
□박영준 : 부처님의 존재·인식론은 인과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논리적·과학적으로 전개된다. 그렇다보니 불교 사상은 과학과 크게 상충되지 않는다. 현대의 신과학 연구자들이 말하듯 불교의 존재론이 현대 과학을 뛰어넘는다든지, 최근의 양자론이나 과학의 체계를 미리 예측했다든지 하는 주장은 지나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고, 이론의 도그마화를 경계한 점은 과학이 배워야 할 점이다.
□양형진 : 도그마를 불교적으로 풀면 ‘깨어있지 않음’이라 말할 수 있다. 불교는 모든 것에 대해 부정해보고, 의심해보는 그런 태도를 강조한다. 포퍼 같은 이는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믿어왔던 것이 부정당하든가 했을 때 과학은 크게 발전해왔다. 의심하는 자세, 깨어있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우희종 : 공감한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불교와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해온 과학의 부분을 불교적으로 재조명해 기존 과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 아닌가. 면역학 연구에서 불교는 도그마화에 대한 경계 이상의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개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련된다. 생명이 생명체로 나타날 때 가장 큰 특징은 개체성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만의 고유성 존엄성 개체 고유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과학은 개체론을 연구하지 않는다. 사람을 해체해서 장기로, 장기를 해체해서 세포로, 세포를 해체해서 유전자로 분석하는 데 머물고 있다. 이 같은 환원적 방법은 보편원리를 찾아낼 수 있지만 개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최근 일부 과학자들은 구성요소들이 형성하는 관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양형진 : 불교와 과학의 대화에 있어서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우희종 : 막연하게 ‘과학은 이런 것, 불교는 저런 것’ 하는 식의 단정과 배타적인 자세는 금물이다. 과학은 과학대로, 불교는 불교대로의 언어가 있다. 영어 모르는 한국인과 한국어 모르는 미국인이 말이 다르다는 이유로 싸울 필요 없지 않은가. 상호 보완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배타성은 부처님이 가장 우려했던 바다. 불행히도 지금 시대는 과학이 종교화 돼 모든 것이 과학적이고 실증적이지 않으면 미신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 같은 태도를 멀리하고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양형진 : 한국사람과 미국사람의 예를 들었는데,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의사소통은 못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도 있다. 참선만 했던 이가 과학 이야기를 듣고 ‘그거다!’라고 바로 간파하는 경우를 본다. 불교와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겉모습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른데도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박영준 : 부처님 가르침이 문제 본질을 접근하는 태도의 지침을 제공한다는 데는 동의하나 불교의 전통이 우주의 발생이나 존재의 기본적인 팩트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측면이 있다. 교리와 서양과학 개념들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양형진 : 그런 자세에 입각해 불교와 과학의 소통 지점을 논의해보자.
□박영준 : 현대과학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모든 것이 순간순간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에 따라 본질이라 믿는 것들은 사실 본질이 아니다. 과학은 엄청난 실험과 수학적 배경을 통해 이 같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옛 조사들은 수학적인 방법을 도통 모르면서도 현대과학의 정수를 꿰뚫고 있었던 것만 같다. 수학이라는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 도달한 양자역학의 결론을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본 선사들의 깨달음과 일치한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우희종 : 무상은 연기와 맞물려 있다. 그래서 생명현상 자체를 관계로 바라보는 부처님 말씀이 와 닿는바 많다. 생명과학자들은 지금까지 개체성을 해체하고 관계를 끊은 다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물리적 반응을 봤다. 그 한계가 분명해진 상황에서 불교의 관점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불교는 가치의 측면에서 연구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돕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자본주의적 유물론에 입각한 것인지, 우리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과학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게놈 프로젝트에 투입된 연구비가 어마어마한데, 그 돈으로 제3세계 굶주린 사람을 도와준다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물론 첨단과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과학자들이 유전자를 밝혔음에도 우리가 얻은 것은 한 두 가지 난치병에 대한 지식에 불과하다는 점을 되새겨볼 때 오늘의 생명과학이 명분상으로는 아름답지만 과연 인간의 삶에 얼마나 기여하며 의미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양형진 : 상위구조가 하위구조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말 같다. 서까래 안에는 집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다. 서까래라고 하는 것인 그냥 떨어져 있으면 나무토막이지만, 제 자리에서 그 역할을 하면서 있을 때 서까래가 된다. 그렇다면 서까래라고 하는 개념이라든가 서까래라고 하는 어떤 존재자를 상정했을 때 그 안에는 이미 집이 들어와 있는 셈이라고 말하고 있다. 생명을 분할하면 물질들로 나눠지겠지만 그 생명체를 이해할 수는 없다. 개개의 하위구조에 그 무엇. 심장 같은 것들은 그 자신의 변치않는 성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전체 정보가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우희종 : 서까래는 그 관계 속에 있을 때 집이다. 뒤집어 말해 서까래에 집의 개념이 들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착각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집이 있다는 것이다. 서까래를 보고 집을 상정한다고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있다. 이 서까래는 일층집의 서까래일 수도 있고 이층집 서까래일 수도 있다. 서까래 일부분을 찾아내면 전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건축물에 사용될 때는 다른 집으로 형성될 수 있음을 종종 잊어버린다.
□양형진 : 그것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무아다. 같은 서까래가 각각 다른 집에서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 산소는 똑같은 산소인데, 물이 되기도 하고 이산화탄소가 되기도 한다. 산소원자라고 하는 그 놈의 본질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그 문제다. 산소원자가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자의 오류다. 그 성질이 산소 원자 안에 있느냐. 산소끼리 만나면 산소가 되고, 수소랑 만나면 물이 되는데. 이런 게 제법무아다.
□박영준 : 산소 분자의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과학적인 방법을 따르면 산소의 본질은 측정을 통해 파악된다. 그런데 측정을 하면 그 순간 산소분자의 성질은 변해버리고 만다. 산소의 본질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그 본질을 알기 위해 산소에 빛을 비췄을 때 그에 의해 변화된 산소분자일 뿐이다.
□양형진 : 쉬운 말로 하면, 어떤 물질에 푸른 등을 비추면 푸르게 보이고, 붉은 등을 비추면 붉게 보인다. 이 물질이 푸른 것인지 붉은 것인지, 더 나아가 그 본질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푸른빛을 비출 때 그것이 내게 푸르게 나타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대상을 측정하면서, 측정 대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 뿐 본질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조차도 알 수 없다는 얘기다.
□박영준 : 파랗게 느끼게 되는 까닭은 일정한 과정을 통하면서, 그렇게 지각하면서 살도록 짜여진 시스템 때문이다. 나는 내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파랗게 보이게끔 하는 시스템이 나와 자연에 갖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전체가 어우러져 나라고 하는 인연을 만들어낸 것이다. 인연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희종 :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음은 자명한 것 같다. 사십년 전 초등학교 다닐 때 지금과 나는 틀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그 무엇은 있다. 그러면 나는 어디서 왔는가. 결국 관계성에서 왔다. 나를 규정하는 물질이 몸에 있다. 내 살이 남의 조직에서 거부하는 것처럼 그러한 조직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물질도 고정돼 있지 않다. 부모님에게서 조직을 받았기 때문에 고정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연구에 따르면 열 살 때 붙일 수 있던 조직도 사십대에는 붙이지 못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신체의 나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것마저도 변한다. 분자수준에서도 계속 변하는 것이 생명체다. 근대 생명과학이 극복해야 될 부분이고 방향 설정에 불교가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양형진 : 문제는 지금 우 교수님의 말을 아무리 과학적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나라고 할 만한 단백질이 없구나”라고 깨달아도 ‘나’라고 하는 아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희종 : 모든 생명체는 아상을 갖고 있다. 질문에는 아상을 가진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없다. 나라는 개체성을 이루고 있는 상이 없다면 세상은 썰렁할 것이다. 어쩌면 아상을 버리려고 하는 것이 헛된 짓일 수도 있다. 생명체는 아상이 필요하다. 필요한 도구 이전에 개체를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지적한 것은 고정된 상을 갖고 그에 머무르려 하는 것이다. 개체를 이루는 아상과 진정한 참된 나와 차이가 없다는 불이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양형진 : 생명현상의 전제조건은 안팎을 구분하는 막이다. 그런데 그 벽이 고정불변의 것이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생명은 개체성이 유지되는 가운데, 물질대사를 해야만 한다. 안과 밖이 한시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구별할 수 있는 변하지 않는 안과 밖은 없다. 여기에 종교적인 관점을 도입하지 않으면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안과 밖이 존재하면서도 명백하게 구별되지 않는 생명체의 특성은 어느 한 편에 치우친 사량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중도적인 관점이 요구된다. 아상은 생존의 장치로서 필요한 것 같다. 원시적인 생명체 또는 하등동물의 경우 매순간 죽느냐 사느냐 판단해야 한다. 내가 살 수 있나, 저 대상을 내가 먹을 수 있나, 나와 교배할 수 있나 등을 판단하지 못하면 생명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아상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체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도구다. 그것을 인간에 적용할 때, 아상이 극대화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상은 극대화하면서 동물세계에는 있지도 않은 욕심이 심화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런 경우에 대한 치유책인 것 같다.
□양형진 : 과학이 빠르게 발달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과학을 연구하는 인간이 과학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든다. 불교적 관점에서 이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우희종 : 과학 자체의 발전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욕망의 구조로서 발전한다면 그것은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의 생각을 바꿔줄 수 있다. 깨어있는 자세로 욕망의 문제를 인지하고, 연구에 임해야 한다.
□양형진 : 과학의 발전이 중생의 삶과 행복에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영준 : 자본주의에는 자본을 재창출하는 거대한 시스템이 있고, 우린 그 안에 있다. 그런 시스템이 반드시 탐진치 위에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시스템을 추동하는 중요한 힘 가운데 하나는 분명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다.
□우희종 : 불교와 과학이 만나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말한 행복의 모양새가 우리 일상의 삶 속에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상의 삶이 절대적 행복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공허한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이 시대 패러다임이다.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경제 정치적인 것이다. 요즘 정치생태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국 우리가 자본주의 속성을 가진 사회의 틀을 바꿔보자. 물론 개인의 자각을 통해 그러한 이상향이 온다는 것은 소박한 꿈이다. 우리 생명체 자체는 탐진치로 구성됐다. 태어나면서부터 먹고 마시고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관계성이다. 그런데 탐진치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 탐진치가 다양한 이 사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각자의 모양새를 존중하는 탐진치가 아니라 소위 잉여가치를 창출해 내기 위해 대상화시키고 착취시키는 자본주의 모양새가 개선돼야 한다. 개선책이 부처님 말씀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바닥에는 욕망이긴 하지만 잉여가치 통해 자신의 확장시키고 남을 대상화시키는 욕망이기 때문에 되돌아봐야 한다. 승가 공동체 모양이라든지 그런 유형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이념의 틀을 만들어주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다.
□양형진 : 그런 점에서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사회에 대해서 근원적인 반성을 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큰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과학과 불교 에 대한 논의를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우희종 : 지금까지 과학은 자본주의의 수단으로 오히려 자연과 우리의 삶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너와 내가 어우러지는 연기적인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불교와 과학은 불교적 세계관, 그러한 방향을 도입해야만 새로운 과학으로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박영준 : 불교는 역사적으로 과학과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던 전통이 있다. 불교가 과학을 선도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다.
□양형진 : 세계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의 논의가 더욱 발전돼 모든 중생이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정리=남동우·박익순 사진=박재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