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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바쁘게 삽니다. 무자비한 속도에 휘둘리는 일상생활에 ‘여유가 없다’고 현대인들은 넋두리를 합니다. 아니 속도에 찌들어 가고 있습니다. 한 템포 늦춘 삶의 속도. 세상의 재빠름과 타협하지 않는 여유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속도의 병에 걸린 현대인들. 그들이 지금 이 순간, ‘느림’에서 그 병의 처방을 찾고자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단순하게, 욕심을 덜 부리려고 합니다. 명예나 부를 축적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느리게’ 삶의 여유를 즐기려는 바람에서 입니다.
그럼, ‘느림’을 동사로 형상시키면 어떤 모습일까요? ‘느림’이란 화두를 들고 삶의 여유를 맛보는 사람들과 우리의 생활 속 곳곳에 배어든 느림의 미학을 담아보았습니다.
느림 예찬
장석주 / 시인, 문학평론가
평안하게 지내시는지요? 제 거처에는 복숭아꽃 살구꽃 배꽃 지고 지금은 영산홍 붉은 꽃이 한창입니다. 금빛 환한 햇살 아래 난만하게 핀 꽃들은 기분을 화창하게 만듭니다. 벌과 나비들은 꽃들 주변에서 닝닝 거리고 바람은 꽃그늘을 흔들고 지나갑니다. 꽃 빛도 좋지만 꽃진 뒤 묵은 가지에 돋는 연초록 잎들도 볼 만합니다. 모란과 작약은 쑥쑥 꽃대를 밀어 올립니다. 밤 되면 무논 개구리 떼 울음소리가 귀를 청명하게 합니다. 새벽엔 장끼들의 울음소리와 텃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밤나무 숲을 울립니다.
저는 새벽에 일어납니다. 어둠 속에서 단전호흡과 명상을 한 뒤 찬물로 낯 씻고 나옹 선사의 선시(禪詩)를 읽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 창공은 나를 잡고 티 없이 살라하네. /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새벽에 읽은 것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시골에 내려와 산 지 다섯 해가 됐지요.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살이가 당연하지만, 산업사회로 넘어오며 사람들은 자연과 시골을 잃어버렸습니다. 시골이 화폐경제적 가치의 척도에서 낙후된 곳으로 전락해버린 뒤 사람들은 시골을 헌 구두짝이나 되는 것처럼 미련 없이 버렸지요.
시인은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서정주)고 노래했지만, 교육과 문화의 변방지대인 시골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신 나간 짓이지요. 그럼에도 사람은 타고나기를 꽃과 나무와 숲을 바라보며 마음이 화창해지고 기쁨을 느낍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꽃과 나무를 실내에 들이고, 주말에는 산을 찾거나 근교로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명절에는 불편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을 찾습니다. 고향을 찾는 것은 본능에 속한 일이지요. 왜 사람들은 시골을 찾고 고향을 찾는 것일까요? 꽃이 피고 맑은 강이 흐르는 고향에서의 삶은 심미 감각의 근거이며, 자연 속에서 느린 리듬을 타고 흐르던 삶이 행복한 삶의 한 원형인 까닭이지요. 그래서 생활이 곤핍해지고 영혼이 남루해질 때 사람들은 더욱 고향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풍경이란 단순한 자연의 물리적 형상을 넘어서서 자아와 교감하며 자아를 저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그 무엇입니다. 사람은 풍경을 낳고, 풍경은 사람을 낳고 기릅니다. 수려한 산과 들, 계곡과 폭포, 단애들, 소쇄원(瀟灑園)과 같은 인공정원은 우리를 심미적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지요. 예부터 군자들은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을 발품 팔아가며 찾아가서 천품을 수양하는 것을 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산수(山水)는 사람 됨됨이의 태생적 근거로 작용하는데, 바로 거기에서 풍수지리학의 당위성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높은 산은 푸르러 옷자락에 방울 듣네.
연꽃 바람 산들산들 맑은 향기 보내오니,
이 바로 선향(仙鄕)에 든 게로구나.
잎 지매 가을 기운 짙음을 알고,
달 밝아 밤 한기가 오싹 하구나.
난간 기대 이따금 술잔 따르니,
나와 세상 둘 다 서로 까맣게 잊었네.
고려 말 선비인 안노생(安魯生)은 이렇듯 시정의 티끌과 같은 삶을 떠나 푸른 이내에 잠긴 선계(仙界)에서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나가 깊고 높은 산 속에 은둔하는 삶을 이상으로 삼은 것이지요. 은둔하는 사람이 급하게 살 까닭은 없겠지요. 조선조의 선비들도 약초를 캐고 달이나 구름과 벗하며 사는 몽유경의 삶을 이상으로 삼았지요. 청학동이나 무릉도원은 난세를 피하고 싶은 선비들이 꿈꾼 유토피아, 일종의 피세공간(避世空間)이지요.
만장봉이 집 앞에 우뚝하니, 빈 수풀에 사립문 내지 않았네.
꽃은 떠서 물에 흘러가고, 누각은 흰 구름과 함께 난다.
봄 늦어 새들은 서로 지저귀는데, 날 저무니 사람은 홀로 돌아간다.
시끄럽게 앞에 가는 사람아, 어찌 앉아서 권세를 잊으려 하지 않는가.
겸재 정선과 같은 시대를 산 조선 선비 창암 박사해(朴師海)의 시지요. 겸재는 <장동팔경첩>에서 백운동 일대의 풍경을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이 시의 배경이 된 곳이지요. 지금 지명으로는 서울 자하문길 서쪽 골짜기지요. 당시에는 외길을 구비 돌아가야만 하는 외진 곳으로 장송이 서로 가려 바람에 슬피 우는 깊은 골짜기였겠지요. 선비들은 여기 말굴레 울리며 들어와 붕회(朋會)를 이루는데, 노래와 투호로 그 즐거움은 끝이 없었지요. 자연과 더불어 사는 느린 삶의 즐거움을 인생의 지복으로 여기고 추구한 옛 시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자연이 사람의 심성을 순화시키고,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이어지는 데서 산수인물양육론(山水人物養育論)이 태동하는 것이지요.
산이 날 에워싸고 /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 아들 낳고 딸을 낳고 /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 밀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될 하네(신경림, <목계장터>)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 초가 지붕에 박 넝쿨 올리고 /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 삽살개는 달을 짖고 /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노천명,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박목월과 신경림, 노천명의 시에서 보듯 현대의 시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상호 투쟁과 복잡다단한 이익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한 느림의 삶에 대한 그리움은 본질과 근원에 대한 추구와 잇대어 있습니다. 산서리 맵고 물여울 모질어도 풀속에 얼굴을 묻거나 바위 뒤에 붙어사는 게 사람이지요. 매운 산서리도 모진 물여울도 지나가는 걸 아는 까닭이지요. 씨 뿌리고 밭 갈며 사는 삶, 들꽃이나 강가의 잔돌이 되어 사는 것, 산골에 들어가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사는 것은 사람이 꽃과 고향과 땅과 하나가 된 삶의 표상이지요. 이렇듯 느림의 삶은 문명의 억압에서 문득 자유롭게 된 삶이지요. 아울러 고요와 평화가 깃든 가운데에서 생명의 내적 필연성으로만 피어나는, 나와 세계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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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는 자연과 벗하며 느리게 사는 삶입니다. 실존의 선택이 있어야만 가능하지요. 계곡 물은 급하고 빠르지만 물은 넓어질수록 낮고 느려집니다. 더 단순하게, 더 느리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본질에 더 가까워지고 지혜가 생깁니다. 천천히 밥 먹고, 천천히 걷고, 천천히 바라보고, 천천히 말하고,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사람을 사귀어야 합니다. 그 단순함과 느림 속에서만 삶이 꽃피어날 수 있습니다. 늘 앉은자리를 청정도량이라고 여기고, 그 순간을 오롯하게 숨쉬고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사는 것입니다.
느림 속에서 늘 고요와 평안을 찾으시길 빕니다. 합장.
필자 : 시인 장석주는?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과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하며 등단. 시집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등 40여권의 저서를 펴냄. 새 책 <느림과 비움>, <책은 밥이다>, <풍경의 탄생> 등을 잇달아 내놓음. 지금은 안성의 수졸재에서 글쓰기와 명상과 산책을 하는 한편, 동덕여대와 경희사이버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