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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불교가 확산되면서 불사 또한 성행해 392년 평양에 9개의 절이 지어졌고, 498년에는 금강사·반룡사·금동사 등 많은 사찰이 창건됐다.
백제지역에서는 385년 한산에 사찰이 지어진 것을 시작으로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538년 이후 많은 절이 창건됐다. 지금 절터가 남아있는 곳으로 정림사·미륵사 등이 대표적이다.
불교를 528년에서야 공인한 신라에서는 통일 전까지 40여사의 창건불사가 있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개경에는 법왕사·왕륜사·자운사 등 10대사찰이 건립되고, 수도 이외 지방에도 많은 사찰이 지어지며 전국적으로 불사가 확산됐다.
이처럼 활발했던 불사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위축돼 새로운 사찰의 창건은 멈춘다. 하지만 각 사찰의 보수·중창·복원 등의 건축불사와 조각·탱화불사 등은 다양하게 나타나 선대못지 않은 불사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 불사의 비중은 전대에 비해 낮게 평가될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의 전 역사를 통해 불사는 꾸준히 진행됐으며, 국가적인 뒷받침 또한 컸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인 구복과 국가적 차원의 호국에 대한 기원이 불사의 원동력이 됐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이뤄진 많은 불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이는 기능인이다. 하지만 그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불사를 지휘했던 상관(上官)의 이름만 남아 있어 기능인들은 다만 종사자 중 한명에 불과한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기능인에 대한 인식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개선돼, 무형문화재 제도가 도입돼 시행중에 있다. 무형문화재는 기능보유자·명인 등을 지정·관리하는 제도로, 도편수·대목장·조각장·단청불화·범종장 등 각 방면의 전문인력의 예술성이 계승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작품 속에 묻혀버린 채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던 과거에 비하면, 현재의 무형문화재제도는 기능인의 혼과 솜씨를 사회적으로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제도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능인에 대한 처우는 만족스러운 수준이 못 된다. 또 외국에서 수입되는 불교조형물들이 기능인의 입지를 위축시키는 등, 기능인의 위상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이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개선이 요구된다. △기능보유자들을 무형문화재 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에 인색하지 말 것 △기능인이 적은 분야의 전승 교육을 강화할 것 △기능보유자에 대해서는 위상에 맞도록 처우를 개선할 것 △전통문화재 보수 등에는 기능보유자가 참여하도록 의무화할 것 △전통에 어긋나는 조형물이 불사의 전통미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법제도를 개선하거나 엄격하게 적용할 것.
[논평] 최기영(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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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무형문화재 지정 관련해서, 장인을 되도록 많이 등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호칭이 먼저 바뀌어야한다. 국보나 보물 등의 물건을 지칭하는 말로 불리기보다는 지방문화재는 인간문화재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는 국가인간문화재란 호칭을 쓰게 하면 기능인들이 느낄 책임감과 사명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기능인 편중 현상은 전통문화보존차원에서 속히 대안이 마련돼야 할 문제다. 한국기능인협회는 자격증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고 정례교육으로 자질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소득이 보장되는 분야에 사람이 더 몰리는 현상은 협회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다. 정부차원의 대책마련이 절실하다.
끝으로 짚어야 할 것은 불교조형물 수입의 심각성이다. 언제부턴가 알게 모르게 국적도 근거도 알 수 없는 수입품이 사찰 경내는 물론 법당 안까지 침범해있는데, 이로 인한 불교미술계의 교란과 기능인들의 생계문제는 개탄스러운 일이다. 자칫하면 불교 전래 이후 1700년간 이어온 불교미술계의 맥이 끊길 수도 있다.
한 나라의 전통과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전통예술품에는 기능인들의 피땀어린 정성과 노력이 배어 있다. 이 같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입된 불교미술품이 우리사찰에 발을 들일 수 없도록 불교계 및 정부의 강력한 규제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