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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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당 동일 대종사의 '참회진언'
"인과믿고 선업 쌓아야 잘 살아"
벽암당 동일 대종사.
사월 초파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는 우리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 사바세계에 몸을 나투신 것입니다. 자신만이 깨달은 진리를 가엾은 중생들에게 회향하기 위해 그 몸을 우리곁에 드러내신 거룩한 날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불성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 불성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스스로 존엄하고 평등하며 자비로워야함을 알게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 한 생을 어떻게 살고 왜 사는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처님이 오심으로 삶의 나침반을 찾은 셈입니다. 이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민족은 불법(佛法)을 만난 이후부터 사월 초파일을 최대의 명절로 기려왔습니다. 무지를 깨고 지혜를 밝히는 등을 만들어 달아 그 빛을 폈으며, 불우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등을 밝히고 보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 무리를 지어 탑을 돌며 부처님처럼 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 전 백성의 민속 축제로 치러지던 이런 초파일 의식과 놀이들도 서구의 종교와 문물이 밀려들면서 요즘은 점점 위축되고 있기는 합니다. 마치 물질 앞에 가위눌린 현대인들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외형이 변한다고 해서 근원과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처님이 사람의 몸으로 나셔서 각고의 6년 고행결과 마침내 성도하시고 45년 전법도생에 나서신 그 생애와 진리는 불변인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이 진가를 드러내느냐 못드러내느냐 하는 것은 중생 각자의 인연 소치인 것입니다.

귀한 가르침을 뼈저리게 가슴깊이 인지하고 하나하나 생활 속에서 실천해내는 중생은 복이 있는 중생이고 그렇지 못한 중생은 밝은 깨침이 무엇인지 조차 알기는 커녕 들어보지도 못한채 무명 속에 살다 가는 것입니다. 박복중생인 것이지요.

부처님은 법신불(法身佛)로 처처에 상주하고 계신데 오고감이 있지 않습니다. 삼천대천 세계로 끝없는 가지가지의 중생을 요익케 하십니다. 물에 사는 중생은 물의 요익을 얻고, 육지의 중생은 땅의 요익을 얻고, 물속의 중생은 물속의 요익을 얻고, 허공의 중생은 허공의 요익을 얻게 해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부처님 오신날을 특별히 챙기면서 기리는 것은 우리 인간과 꼭 같은 모습으로 나투셔서 눈높이를 맞추신 화신불(화신불)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 무량억겁 전에 연등불소에서 수행하실 때에 그 부처님에게 “너는 미래세에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되어 무량중생을 제도하리라”하는 수기를 받으셨습니다. 그 뒤에 여러 부처님이 출현할 때마다 수행을 쌓아 중생을 교화하시다가 사바세계에 오시기 전에는 도솔천에서 호명보살로 계시면서 천인(天人)들을 교화시키셨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바세계의 중생을 교화할 인연이 닥쳐옴에 흰 코끼리를 타시고 사바세계에 내려오셔서 마야부인에게 탁태하시어 마침내 강탄하셨습니다. 사생의 자부 이시고 삼계의 도사이신 부처님은 그렇게 나투신 것입니다.


벽암당 동일 대종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워 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생들 사이에서 보기에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많이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인간은 누구에게나 부처님의 종자인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너 나 없이 부처님과 같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2천 6백20년전 부처님이 이땅에 오시면서 인류는 자비와 평등이라는 사상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우리 중생들은 한결같이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배부르고 몸편한것 입니까. 거기다가 맘도 편하면 더욱 좋겠고.

그러나 아닙니다. 잘 산다는 것은 인간의 완성인 성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는 “어서 성불하게 해달라”는 기도여야 합니다. 어쩌면 세속과는 다른 출세간의 스님이나 하는 풀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런 자세의 기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좋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인과를 이해하면 더 극명하게 와 닿게 될 것입니다.

흔히들 이렇게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대는 다 똑같이 이루어져 있어서 다 같아야할 터인데 어찌해서 어떤 사람은 추악하며, 어떤 사람은 현세에서 과보를 받고 어떤 사람은 후세에 가서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 답은 그 행위를 따라 이런 과보의 차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내가 거울을 들여다 보면 내 모습이 거울에 나타납니다. 연꽃을 거울에 비치면 연꽃이 거울에 나타납니다. 즉 거울이 그 대하는 사물의 모양에 따라 비추이는 모습이 각기 다른 것과 같습니다. 밭에 배추씨를 뿌리면 배추가 나고 무씨를 뿌리면 무를 수확하게 되는 것입니다. 밭에 뿌려진 씨가 각기 자각하지 못하지만 저절로 싹을 트는 것과 같습니다. 업(業)의 본성도 이러합니다. 온갖 중생은 제 번뇌로 지어진 업에 의해 그 몸과 사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 모두가 다 현세의 업 때문만은 아니며, 그 원인이 과거세에도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인(因)을 짓지 않는다면 미래에 받아야 할 과(果)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우주와 인생은 모든 유정물들이 제각기 지은 업력에 의하여 각자의 환경과 그 자신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업력의 힘이 얼마나 센지 들어보시겠습니까. 지장보살님이 보현보살님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업력이란 매우 큰 것이어서, 능히 수미산을 대적하며, 능히 큰 바다 보다도 깊으며, 능히 성도(成道)의 장애가 되는 터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작은 악이라 해서 가볍게 알아, 죄가 없는 듯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죽은 뒤에는 과보가 있어서 아무리 미소한 것이라도 모두 받게 마련입니다. 피를 나눈 부자 사이라 할지라도 사후에 갈 길이 각기 다르며, 설사 만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과보를 대신하여 받아줄 수는 없는 터입니다.” 참으로 업력은 준엄하며 공평하고 철저한 것입니다. 지은 만큼 받는 도리외에는 달리 피할 길이 없는게지요.

그리고 나는 어려서 큰스님께 이런 말씀을 자주 들었습니다. “업은 외상도 에누리도 없다”는 말씀 말입니다. 이것이 업인업과(業因業果)의 철칙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잇게하는 곡식도 씨로부터 싹이 나오고, 싹으로 부터 줄기와 잎을 치고 그 결과 열매가 있어서 생겨납니다.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생길 도리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과(業果)도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상속해 생겨나 이에 과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좌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무슨 세상 사람이 얘기하는 숙명론이니 하는 것처럼 정해진 이치대로 불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찰나찰나 선과 악이 교차합니다. 순간순간 극락이 되었다가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우주만물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이 가장 변화무쌍합니다. 선업과 악업을 무수하게 쌓으니까요.


따라서 ‘잘 사는 길’이란 인과를 믿고 인과가 무서운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 앞에서 고생스럽다고 해서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지금의 상황이 어떤 인연으로 초래된 것이고 그 결과 이러할 수 밖에 없겠구나 하고 헤아리는 그 생각과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많이 배워서 얻는 지식이 쌓였다고 해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는 바로 인과를 살피는 혜안입니다, 지혜있는 이는 설사 전생의 악업으로 해서 고통과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풀어나가야 하는 길을 스스로 찾게됩니다. 그래서 힘든 삶도 가닥을 잡아가며 해결해나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세상말로 잘난척을 합니다. ‘대현대우(大賢大愚)’라는 말도 있지않습니까. 크게 현명한 사람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 어리석은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다보면 인과에 작용하는 업력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업력이 무섭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업력이 우리 중생들이 그렇게도 소망하는 성불에 이르는데 장애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악업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 두터운 업장을 모두 녹여야만 완성된 인격인 성불에 이르게 되니 말입니다. 알게 또 모르게 지은 업장을 눈 녹이듯이 녹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그런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참회하십시오. 두터운 업장을 소멸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우리 중생들은 육도의 거리에서 숨바꼭질 하듯이 삼계에 윤회합니다. 탐, 진, 치 삼독망념을 내서 삼계고해에 윤회하는 자신을 구제하겠다는 자각에서 참회를 하도록 하십시요. 나는 건강이 좋지않을 때라도 매일 하는 참회진언을 반드시 합니다. 다생겁래로 신(身) 구(口) 의(意)가 지은 업을 참회해 버리겠다는 원력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이 진심으로 다시 악업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참회하면 그 한 생각에 다 탕진소멸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바싹 마른 풀을 불에 태워 없애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과에 어긋난 말이나 행위를 하지않고 또한 마음 조차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세상 일이라는 것이 단독 운행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좋은 일 나쁜 일이 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기 마련인데 양심에 빗대어 좋은 일만 하세요. 그것이 선업을 쌓는 것입니다. 즉 선업을 저축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되면 업장소멸은 저절로 됩니다. 업의 노예가 되지말고 업을 창조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약력
·1924년 경남 남해 生
·25년 일본 관서공업전문대 졸
·46년 서울 호국사 역경원서 적음스님 은사로 득도
·49년 역경원 대교과 졸업
·60~66년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
·68~75년 선학원 원장, 이사장 역임
·68~73년 동국학원 이사장
·72~7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현대불교신문 DB |
2005-05-06 오후 2: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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