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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세간에는 육신을 가진 생명, 또 감각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생명 등 많이 있습니다. 육신을 가진 생명만도 땅 하늘 바다를 포함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생명을 한데 묶어서 무리 중(衆)자 날 생(生)자를 써서 중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생세간이구.
‘제행무상’바로 알면 절망 이길수 있어
“웃고 사세요…웃고 살면 여유 생겨요”
그러나 이렇게 많은 중생들이 생명을 가지고 살지만 그 누구도 자기의 생명이 어디서 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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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생명의 정체를 잘못 알고 사니까 바른 생활이 어렵고 어긋나는 생각이 이어져 나와 그것이 입으로 가면 구업(口業)이요, 행동으로 나타나면 신업(身業)이요, 생각으로 가면 의업(意業)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신·구·의 3업이 생명의 본질과 맞지 않아 나오는 셈이지요. 그러다보니 중생의 삶은 공연히 전후사방의 좁은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시간과 공간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신후 중생세간을 살펴보니 내 몸속에 따로 내가 있다는 망상을 하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나라는 분별을 가져 구분을 하고 집착을 하면 탐심과 진심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모여 나라는 집착을 한다고 해도 생명의 본질은 원융한 그대로일 뿐입니다. 그것을 법성(法性)이라고 하는데 가히 시간적으로 끊을 수도 없으며 나눌 수도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은 세상의 과거 미래 현재를 한꺼번에 보셨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저 이것을 자꾸 나누고 끊어서 자기것으로 하려고 하니까 자체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고, 자연히 법성의 자리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병통입니다. 중생들은 과거에서부터 미(迷)한 상태에 처해서 앞으로 몇겁 몇천겁 후에까지 윤회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나라는 집착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집착을 아집(我執)이라고 하는데 아집으로 인하여 생사를 두려워하고 자기의 생활이 욕망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고통과 번뇌에 싸여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모양, 이와 같은 성질 이와 같은 중생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꺼번에 도장찍어 놓은 것과 같이 보시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은 저마다 다른 업을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공기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공기속에서는 자재함을 얻지요. 반면 물고기는 물 속에서 자재합니다. 올빼미나 박쥐는 어둠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업이 다르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만약 공기가 사람의 눈에 보인다고 생각해 봐요. 또 물고기의 눈에 물이 보인다고 가정해 보자구요. 그러면 분명히 사람이나 물고기들은 공기와 물에 부딪칠까봐 제대로 숨조차 쉬겠습니까. 행동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무슨 말이냐면, 집착을 하면 오온이 개공할 수 없고 따라서 자재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이말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는 모든 감각이 각자의 업대로 나타나거든. 같은 사람일지라도 업이 다 다르니 우리가 이 업을 깨고 그 불성(佛性)에 합하여질 때 기운이 옳게 만들어지며 바로 이를 부처라고하는 것입니다. 요즘 경제적 어려움이 깊어져 너 나없이 우울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잘 되고 못 되는 것 지금 우리와 같이 이렇게 된 것 모두 우리나라 정계 재계지도자는 물론이고 국민 스스로 이렇게 오도록 행동했던 인과입니다. 콩의 씨앗을 뿌렸기에 콩의 싹이 돋았다는 말이예요. 분수는 생각 않고 사치와 허영에 날뛰었던 거지요. 지금이라도 또 그렇게 행동하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올 수 있는 상황입니다.
몸의 병도 마찬가지예요. 병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한사람이 병에 걸리면 비로소 전염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전염도 없는 것이거든. 그런데 병걸릴 환경이 됐기 때문에 순식간에 온통 전염되고 마는 것이지요. 생각해봐요. 그동안 우리는 100원이 있으면 더 붙여서 자랑부터 했다 그겁니다. 허풍이고 가식입니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분에 넘친 생활을 말아야 합니다.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 전체가 공동책임이 있는 공업(共業)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경제난이 불변의 상황이 아니라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속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고정된 것이 없는 변화하는 흐름입니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진리에 희망의 마음을 싣게 되면 이 경제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생각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은 평정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거든요. 그것은 비로소 어려움에 흔들리지 않아 극복할 수 있는 눈을 뜨게 합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변하기에 우리는 희망을 지닐 수 있는 것이고 그 여유 속에서 극복이 가능합니다. 마음의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지요. 우리의 일체는 마음에 달려있어 자꾸 희망을 가지면 나쁜 기운은 가 버리고 간절히 바라는 바는 성취됩니다. 그리고 많이 웃으세요. 나는 요새 자꾸 웃어요. 또 자꾸 웃으면 다시 웃음이 나오거든. 전화 오면 노래도 불러요. 가사도 리듬도 모두 내 방식의 노랩니다. 요 며칠전에도 외국에서 서양사람들에게 포교하고 있는 숭산스님이 안부전화하는데 노래를 불러주었더니 놀라면서도 같이 좋아하더라구. 오랜 지기들은 사실 내 웃는 모습 보기가 쉽지 않다고들 하면서 많이 변했다고 해요.
습관은 제2의 천성입니다. 인간 사는 곳에 속상한 일 많아요. 속상한 대로 생각하면 하루도 속 편할 날이 없어요.
나도 천성이 지는 것 싫어하고 성질이 급해요. 그러다보니 어려서부터 매사에 내 주관대로 끝장을 내야겠고 해서 싸움도 잘했던 성품이예요. 몸집은 이렇게 작아도 보통학교시절부터 유도부에 들어갔고, 친구들하고도 문제가 생기면 항상 먼저 때렸어요. 급한 성미에 이기고 싶었으니까. 늘상 급장했어도 싸움에 빠지지 않았지요.
어쨌든 인연이 묘하고 엄격해요. 내 속가 고향은 기독교 천도교가 성했던 남해이고 집안은 유교집안이라 불교 믿을 생각도 할 수 없던 환경입니다.
그런데 나는 출가하려고 한암스님을 찾아 뵙고자 강원도로 가는데 누가 그래요, “서울 역경원으로 가라”고. 거기에 우리나라 일류 학승이 다 모여 있다고. 그길로 역경원으로 갔습니다. 당시 원장이셨던 은사 스님(적음스님)을 친견했고 스님이 상좌로 거둬주신 것이지요. 우리 스님은 대범한 분이십니다. 희 로 애 락을 얼굴에 안 나타내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기고 반갑게 해도 얼굴만으로는 가늠을 못했지요. 한마디로 마음의 평정을 이룬 큰 인물이셨습니다. 그 마음을 살필 수가 없어요, 하도 넓고 깊어서… .열반드시기 전 3년동안을 내가 시봉했는데 법명 그대로 적음(寂音)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음식타령 한번을 하신바가 없으셨으니까. 그러면서도 침술을 익히셔서 중생을 이롭게 하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먹고살기 힘들어 가난한 이들은 병원은 고사하고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실정이라 스님의 인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살 길을 열어주신 것이 됐지요.
스님께서 선학원에 계실 땐데 스님의 덕망으로 신도들이 선학원 시주에 대단히 적극적이었어요. 살림살이가 어려워 대중들이 변변히 공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도량도 정비하고 대중들과 정화불사에 열중할 수 있는 기반이 됐던 겁니다.
사실 나도 큰스님을 닮아보려고 해도 잘 안돼요. 그나마 큰스님 덕분에 급한 성미는 많이 고쳐졌습니다. 지도자는 코끼리나 황소처럼 용심으로 행동하며 그 반경만큼이나 포용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종단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와달라는 요청으로 참여도 많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쓸데없는 짓거리라. 한암스님처럼 가만히 있어야 했거든. 중벼슬에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건데.
그런데 요즘 보면 너도나도 큰스님입니다. 심지어 대조사라는 호칭도 쓰더라구요. 과거 역대조사가 그런 식으로 교화하셨거나 호칭되지 않았어요. 아랫사람 또는 신도들에게 문제가 더 있는것 같아요. “과공(寡供)은 비례(非禮)”라 했습니다. 어른을 아무리 존경해도 어울리게 앞뒤가 맞도록 해야한다 이말입니다. 조작이 있어서는 더더욱 안돼요. 수덕사 고봉스님이나 한암스님은 절대로 조실소리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유언의 감화보다는 무언의 감화가 더 크다는 것을 일깨우시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포교도 말많은 것보다는 말없이 믿음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가르침이고 전법이고 포교였으니까요. 옛 스님들은 이렇게 포교하셨습니다. 한암스님이 오대산에 계실 때 40여년간 밖에 나온 일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수행하시면서 품었던 뜻은 내가 자취를 감추어 천년의 학이 될지언정 백년동안 공교로이 말하는 꾀꼬리를 배우지 않겠다는 말씀은 참으로 귀감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나라 일도 그렇고 종단 일이나 개인사도 주의와 이념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제대로 좋게 되기 위해서는 내게 손해가 있더라도 대의와 명분으로 임해야 하거든. 그런데 요즘 세태가 어디 그래요?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무엇을 위해 뭉쳐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무엇이 어떻고를 말하고 싶지도 않고 사실상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과거 큰스님들이 입다물고 있는 것이 다 그런 이유에섭니다.
그저 나는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약력
·1924년 경남 남해 生
·45년 일본 관서공업전문대 졸
·47년 적음스님 은사로 매명스님 계사로 구족계 수지
·49년 서울 호국사 역경원 대교과 수료
·60~66년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
·68~73년 동국학원 이사장
·68~75년 조계종 선학원 원장 및 이사장
·72~7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78년 조계종 종정 직무대행
·現 공주 신원사 조실
정리=위영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