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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계룡산 자락. 서울서 새벽에 출발해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서야 신원사 산문 앞에 도착했다. 사천왕상과 범종각 아래로 펼쳐진 논·밭이 아련하다. 수 백여 년을 버티고 선 대웅전은 일주문을 처음 세운 보덕(寶德) 스님의 기상을 내뿜고 있었다.
신원사 경내는 청정했다. 돌, 잔디, 기와, 벽돌 모두 세간의 모습과는 달리 본래의 빛깔을 그대로 발하며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신원사는 651년 백제 의자왕 시절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수행자에게 승풍(僧風) 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던 보덕 선사의 뜻이 서려있는 곳이다. 지금은 벽암 스님이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기자가 오전 10시 이전에 신원사에 도착할 마음으로 새벽에 서울서 출발했던 것은,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벽수선원의 문 밖을 나서는 게 하루에 고작 3∼5차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중 공양을 위해 선방을 나서는 오전 10시와 오후 3시가 스님을 뵐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한다.
팔정도 따라 살면
부처님처럼 사는 길
서로 몸과 마음 낮추면
용서도 화해도 가능
스님의 법제자인 묘봉 스님을 따라 가 선방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하얀색 털모자를 쓴 벽암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공양 시간에 맞춰 선방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인지, 스님의 옷매무새는 단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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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현대불교신문사. 모두들 잘 지내요. 예전에 한 사람이 날 찾아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별 말을 못해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요즘 건강도 좋지 못해, 나는 제 몸 하나 추스르기 바쁜 노승입니다. 먼 곳을 왔으니 차나 하고 가세요.”여든이 가까운 나이 지만, 스님의 얼굴에서는 맑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방안에 경전이 펼쳐져 있었다. 스님은, 기자의 눈길을 감지하셨는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신다. “스님은 죽음에 들어갈 때까지도 공부를 뒤로 밀어 놓지 말아야 합니다.”수행자는 나이가 들어도 수행자이다. 부처님이 이룬 대각의 경계에까지 가고야 말겠다는 ‘초발심’을 수십년동안 놓지 않았기에,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금과 같이 날카로움과 자상함을 함께 갖춘 스님이 되신 것이 아닐까.
“스님, 이렇게 좁은 방에서 어떻게 지내세요?”
“중에게 방이 좁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요. ‘방장(方丈)’이란 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은 유마거사의 방이 일장사방(一丈四方)이었다는 것에서 왔는데, ‘한 칸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해서 붙여진 것 아닙니까. 그렇게 사는 게 납자의 본분이에요. 또 찾아주는 이 있으면 만나고, 그 인연에 맞춰 법문하는 것이 우리 수행자가 할 수 있는 공덕이지요.”수개월 간 스님의 생활을 지켜 본 신원사의 한 행자는 이렇게 말했다. “큰 스님의 일상에서는 흐트러짐을 본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항상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매사에 정성을 쏟고 관심을 보이시고 있어요. 또 우리에게,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얘기하시는 것처럼 다정하게 삶의 지혜를 주십니다.”스님이 선방을 나서자 신원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학동(學童)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스님의 거동을 돕기 위해서다. 원래 스님의 경력이나 연배라면 족히 시봉드는 스님이 있을 법한데, 스님은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하신다. 대중 스님들이 벽암 스님에게 시자 둘 것을 간곡하게 말씀드렸지만, 그때마다 스님은 “불가에 격이 있을 수 없다. 자기 공부도 바쁠텐데 언제 남 시중들 시간이 있겠느냐”며 거절하셨다고 한다. “스님은 대중의 보시를 받아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공부하지 않은 스님은 죽어서 소로 태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록 힘든 구석도 있지만, 내 몸 하나 내가 건사하면 되는 일입니다. 시봉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촌각을 아껴 공부에 써야 합니다.”계룡산을 휘감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선방의 문지방을 넘는 순간 몰아닥쳤다. 이때 스님은 따뜻한 생각을 해 보자며, 예전의 일화 하나를 들려주셨다.
“따사로운 햇살이 있는 날이었어요. 날이 좋아 선방을 나온 김에 산문까지 산보를 갔다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았어요. 그러자 나도 모르게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죠. 젊은 시절에 공부를 잘 못해서 지금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녁이 되어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내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게 아니겠어요. 그때 벌떡 일어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만드는 데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부처님께 삼배하고 기필코 성불하겠다고 다짐했지요”“스님의 이야기는 불자라는 이름만 붙이지 말고 진실로 부처님처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입니까?”“맞아요. 우선 마음을 비우고 항상 생활해야 해요. 또 바른 신심을 가져야 됩니다. 바른 신심을 가지려면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팔정도에 따라 살면 되지요. 그리고 삼독을 버리고, 자성을 밝히도록 부지런히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보시했던 사람의 집에 소로 다시 태어나는 것만은 면할 수 있어요.”
스님의 점심 공양은 너무 간소했다. 밥과 미역국, 그리고 소찬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래도 스님은 달게 드신다. 그리고 함께 공양하는 대중 스님들에게 “스님들 많이 드세요. 수행자는 몸이 무거워야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잖아요”라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도 보이신다.
“지금까지 참선과 기도로 살아왔으니 참선과 기도말고 무엇이 더 있겠어요. 깨달으면 부처이고, 미혹하면 중생인데 언제나 수행해야지요. 나이 먹었다고 수행자의 본분을 놓아버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특별하게 볼 일이 아닙니다.”모든 사람에게는 부처님과 같은 맑은 마음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근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모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가 있다는 게 가능하다.
스님은 마음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묵언(默言)’을 권한다.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과 말하기를 아끼지 않지만, 스스로 대중 앞에 나서서 법문하기를 싫어한다. “그 자리에 서면 스스로 실생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을 말하기가 쉽고 그것은 죽은 법문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말보다는 실천이 더욱 중요하고, 실천을 보일 수 있는 자리라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스님은 언제나 벽수선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납자들에게 자상한 가르침과 공부 점검을 해주신다. 안거가 시작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선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 후학들에게 용맹정진을 몸소 보여주신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신원사에는 외국인 납자들이 많았다.
<만행,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으로 일반인들에게까지도 잘 알려진 현각 스님도 신원사에서 동안거를 난 적이 있다. 현각 스님은 그 때를 회상하며 “나는 신원사에서 살면서 한국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을 새록새록 가지게 되었다. 수행은 죽음을 앞에 두고 해야 한다는 옛 선사의 가르침이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벽암 스님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동안거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선 수행에 참석한 게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할 정도로 벽암스님은 몸소 모범을 보이신 것.
벽암 스님은 또 계행(戒行)을 늘 강조한다. “청정한 몸에서 청정한 정신이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불교 안팎에서 남을 헐뜯는 말들이 종종 나오는 데,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먼저 살펴야 하고 그 다음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스님이 지키는 계율의 범위가 얼마나 섬세한 부분에까지 미쳐 있는지를 알게 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스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화장실에서 이빨을 닦은 후 물로 입가심하면서 서서 하지말고 앉아서 하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입가심하고 나서 물 뱉을 때 서서 하면 옆 사람에게 물이 튀게 되고, 또 미물에게는 서서 뱉는 물이 폭포수나 다름없으니까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을 다스리는 철저한 수행관은, 스님이 지금까지 법문집 한 권 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범부의 생각에, 수행이 깊어지면 그 경지를 풀어서 가르침이 될만한 말을 모아 펴내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스님은 “스스로 체득할 수밖에 없는 경계를 어찌 말과 글로써 전하려 하겠는가”라며 그것을 극구 반대한다.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모든 행동과 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겠지만, 한낱 범부에게는 스님의 경계를 엿보고 싶을 뿐이다. 그래 스님에게 매달리니 “세상의 일이라는 게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해서 개인적으로나 이 사회를 위해서나 선업(善業)을 쌓아야 합니다. 업장소멸을 위해 우리 모두 매일 참회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라면서 “날씨가 추워지고 있어요. 이제 들어갑시다”며 선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걸으시다가 대웅전을 향해 스님이 수차례 목례를 했다. 스님은 언제나 대웅전과 중악단 등 신원사 곳곳의 전각을 향해 수십차례 목례로 참배를 하시는 것이 일과이다. ‘스님만의 도량석’을 끝내셨는지, 벽암 스님이 선방 문 앞으로 다가오셨다. 기자를 보고 빙그레 웃으시는 스님에게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고민을 하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이 없겠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아직도 멀었어요. 예전에 효봉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알았으면 스스로 분명한 법이다’라고 말이죠. 여기에 해답이 있지 않겠습니까”방법이 없다는 말씀이 아닌 듯하다. 이미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설해놓은 방편이 수백 수천의 경전이고 어록인데, 행하지 않고 예까지 와서 길을 묻는다는 호통같이 들렸다.
선방에 들어가시는 벽암 스님을 향해 합장 반배하고나서 묘봉 스님은 큰 스님의 ‘호통’을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고 좌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세상 사람이 얘기하는 숙명론이니 하는 것처럼 정해진 이치대로 불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매순간 선과 악이 교차합니다. 우주만물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이 가장 변화무쌍합니다. 선업과 악업을 무수하게 쌓으니까요. 따라서 ‘잘 사는 길’이란 인과를 믿고 인과가 무서운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고생스럽다고 해서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지금의 상황이 어떤 인연으로 초래된 것이고 그 결과 이러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헤아리는 그 생각과 자세가 중요합니다.”지혜는 지식과 다르다. 많이 배워서 얻는 지식이 쌓였다고 해서 지혜로워 지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바로 인과를 살피는 혜안인 셈이다. 지혜가 있는 이는 전생의 악업으로 해서 고통과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풀어나가야 하는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힘든 삶도 가닥을 잡아가며 해결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삿된 것을 끝없이 따라다닌다는 말이다.
요즘 신원사를 찾는 불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한다. 벽암 스님의 삶을 조금이라도 엿보는 불자라면 환희심을 느낄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신원사를 다시 찾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벽암 스님은
참선·계행 후학 모범
불교계에 정화의 열풍이 불 당시 벽암 스님은 ‘맹장(猛將) 중에 맹장’이었다는 주변 스님들의 말씀이 있어, 신원사를 향할 때까지만 해도 호랑이 같은 모습을 연상했었다. 그러나 스님의 뵙고 나니 세간의 나도는 말이 잘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 스님은 낯설음과 긴장을 녹여줄 수 있는 따뜻한 인품의 스승 그 자체였다.
벽암 스님은 1924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일본 관서공업전문대에서 공학(工學)을 공부했다. 그 후 스님은 범어사와 수덕사를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 일이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는 단초가 되었다. 수덕사에서 6년 간 공부하다가, 1947년 적음 스님을 은사로, 매명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서울 호국사 역경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 동국학원 이사, 선학원 원장 및 이사장,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조계종 종정 직무대행 등을 거쳐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을 맡고 있다.
벽암 스님은 현재 공주 계룡면 양회리에 있는 신원사 벽수선원에 주석하며, 대중에게는 소탈함과 따뜻함으로, 자신에게는 엄격한 참선과 계행으로, 수행자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