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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자들이 새겨야할 가르침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특별히 전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귀를 막은 동자승, 입을 가린 동자승, 눈을 가린 동자승 중 하나를 들어 보이시고)백천만겁을 윤회하는 가운데 난득(難得) 난득(難得)이라고 해도 사람 몸 받기 어렵습니다. 대통령이 되거나 고시에 합격하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사람 몸 받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람이 되려면 이억 내지 삼억 개 정자 중 다른 것 다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에서 사람 몸 받았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불법(佛法)을 만나는 것입니다. 불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정법(正法)을 만나는 것이 어려우며, 정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종사(宗師) 만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지금 시비가 그치지 않는 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21세기 들어와서 정보사회, 지식사회, 디지털사회라고 하지만 아직 세계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이루려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정진해 반야(般若)의 지혜가 열리고, 반야의 지혜가 열린 사람들끼리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분야에서 일을 하면 불편부당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사부대중 다 같이 정진해 반야의 지혜를 여는 길밖에 없습니다. 스님들이 용맹정진하고 장좌불와해도 망상이 일어나는데 지금 사회나 승단이나 모두 시비를 일삼고 있습니다. 우리 종단도 생각의 차이로 시비가 일어났지만 10년이 넘었습니다. 대사면 해야 합니다. 종회의원이나 주지 자리를 위해 쫓아다니지 말고 어느 회상에 본분납자들이 모여 정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걸망 짊어지고 참선 수행하는 붐이 일어나야 합니다. 입에서는 달다 쓰다 맵다 짜다 맛있다 맛없다 분별하지만 식도로 넘어가면 분별이 없어집니다. 반야의 지혜를 깨달으면 이와 같은 세계가 열립니다.
▲ 수행일화 하나를 소개해 주신다면?
범어사 동산 스님 회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처음에는 마주보고 하면서 상대가 졸면 죽비로 때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대중들이 함께 의논해 상자를 짠 뒤 못을 1센티미터 정도 박아놓고 졸면 이마가 찍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졸다가 못에 찍히면 찍힌 곳에 다시 찍히는 것이었습니다. 마주앉은 스님이 피를 흘리는 걸 보니까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정(大疑情)이 일어났습니다. 법문보다, 책을 보는 것보다,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며 티끌만큼 허튼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전후가 딱 끊어진 경계를 맛봤습니다. 두 철을 그렇게 보낸 후 저의 수행은 묵언과 하심이 됐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스님도 그 어떤 사람도 나보다 못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뒤로 어떤 자리하나 연연하지 안했습니다. 다만 정진만 해오다 보살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계율은 무엇입니까?
통도사 극락암에서 입승으로 한 철을 지낸 뒤 해인사에 금봉 스님이 조실로 온다고 해 그쪽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대구에 도착하니 시장기가 들어 칼국수 집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골목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불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계율을 지키기 위해 오신채도 먹지 않았지만 불고기 냄새가 얼마나 좋던지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정진하던 네가 불고기 냄새가 그렇게 좋게 느껴지는가’ ‘불고기를 주면 먹겠는가’. 그런데 안 먹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저 고기가 전생에 네 어머니라면 먹겠는가. 못된 중생들에게 살생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칼로 베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뜨거운 불에 구워졌는데도 먹겠는가’. 그렇게 몇 번 자문자답을 하다 보니 안 먹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길로 해인사로 들어가 참회했습니다. 참회하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참회했습니다. 오신채뿐만 아니라 멸치 한 마리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저는 밖에서 잠을 자거나 음식을 사먹지 않습니다. 서울에 볼 일이 있으면 새벽에 올라간 뒤 밤이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은사스님을 가르침이기도 했습니다.
▲ 은사스님은 어떤 분이며 그분에 대한 기억은?
56년 전 대학을 졸업한 어느 날 내 형제보다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나 49재를 지내려고 사찰에 갔습니다. 그 당시 강진 만덕선원에 동산전강 스님과 수좌계에서 잘 알려진 선월 스님 도천 도광 스님이 함께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 모습에 마냥 반했습니다. 스님들의 염불소리가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처녀와 총각이 만나 한순간에 반한 것처럼 정신없이 스님을 사랑하고 부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처음 은사스님인 도광 스님을 뵈었습니다. 도광 스님을 뵈었을 때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예감이 밀려왔고, 그것으로 저의 불연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저는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상태였습니다. 출가하겠다는 저의 모습에 은사이신 도광 스님은 절대 믿지 않으셨습니다. “최고 엘리트인 의대졸업생이 웬 출가”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스님은 저에게 3년간 선생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3년간이나 하대를 안 하셔서 말을 낮춰달라고 부탁한 후 그 청을 겨우 들어주셨습니다. 저의 은사 도광 스님은 행(行)으로 도(道)를 닦으셨습니다. 은사스님의 수행은 성철 스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저의 수행은 은사스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 부처님오신날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무엇입니까.
60년대 말쯤의 일입니다. 당시에 선원에 있을 때 부처님오신날을 맞았는데 사중에는 부처님에게 올릴 쌀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선원이라 신도들도 없었고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오신날을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중 스님들과 의논해 약간의 여분이 있던 쌀을 떡으로 만들어 마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로 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떡을 받아들며 기뻐하던 중생들의 모습을 보고 참 기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진정한 부처님오신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빵을, 정신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양식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삼라만상과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 극락정토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참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 저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은 그런 우리의 궁금증과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 현재 종단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현명하게 풀 수 있는지 가르침이 있다면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저는 항상 자기를 되돌아보고 남에게 한 이야기는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그전에 먼저 내 허물을 보고 참회하고 작은 것부터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수행을 체(體)로 삼고 부처님 가르침을 용(用)으로 삼았습니다. 무엇보다 계율을 목숨처럼 여겨야 합니다. 계를 지키는 것이 곧 수행입니다. 지금 세상은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떠나 유럽, 미국 등 선진국들로 눈을 돌려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목말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문명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장악하며 대중들에게 던져준 정신적 소외의식에 대한 충족욕구이기도 합니다. 서구사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그토록 많은 존경과 지지를 받는 것은 이 같은 시대적 현실을 불교가 채워줘야 한다는 명제를 일깨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최고의 수행승단과 재가불자들을 보유한 한국 선불교는 막중한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목말라하는 중생들에 대해 그 감로의 가르침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작금의 현실은 우리 수행승단에 대해 많은 비판과 질책이 쏟아져내려오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승풍을 진작하고 승단이 화합하는 것입니다.
▲ 불자들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말은?
복을 부르는 삼바라밀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망설(妄舌). 교만한 마음으로 진실치 않은 말 하는 것입니다. 분란과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말을 절제하고 조심해 나와 남에게 기쁨과 덕이 되는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망안(妄眼). 부정적인 눈으로 인간과 매사를 어긋나게 보는 것입니다. 가식과 허상으로 가득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망이(妄耳). 달콤한 유혹에 솔깃해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순리와 진리에 겸허한 마음과 자세로 어떤 말에도 흔들림 없이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 종산 스님은?
1924년에 출생한 종산 스님은 48년 구례 화엄사에서 도광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고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출가 후 40년 동안 해인사, 범어사, 통도사, 천축사 등 전국 제방선원에서 41안거를 성만했다. 원로의원와 원로회의 부의장을 역임한 종산 스님은 2004년 4월 원로회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종산 스님은 승용차가 없다. 원로회의가 있을 때는 청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 후 총무원에 도착한다. 스님은 또 지금껏 단 한번의 해외여행도 가지 않았다. 정진하는데 바빠서다.
스님은 사찰운영에도 전범을 보이고 있다. 사찰경영 일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재가불자들이 스스로 사찰을 운영ㆍ관리할 수 있도록 지난 15년간 실시해왔다.
종산 스님은 재가불자들을 위해 “아침에 30분 정도 참선수행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종단 선거법이 돈이 안 들도록 개정돼야 사회에서 종단을 바라보는 부정적 인식이 개선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