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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들으면 섬뜩한 느낌이 든다. 유교이외에는 다른 학문은 철저히 배척했던 명·청 교체기의 사상계를 거침없이 비판한 말이다. 철저한 자기 반성에서 나온 이 촌철살인의 주인공은 유교의 전제에 맞선 중국 사상사의 최대 이단아 이탁오(李卓吾, 본명 이지 1527~1602)다. 그의 사상과 철학, 일대기가 최근에 한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제목은 <이탁오 평전>.
사상적인 스펙트럼이 다양했던 중국. 하지만 이탁오가 살던 시대의 중국은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양명조차 공자는커녕 주희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하지 못했다. 이점을 감안하면 국가에서 인정한 유일한 학문체계였던 유교의 전횡에 반격을 가한 이탁오의 사상사적 위치는 자명하게 드러난다.
가정 6년(1527) 푸젠(福建) 취안저우(泉州)부 진장(晋江)현에서 태어난 이탁오의 이름은 지(贄)다. 탁오는 그의 호이다. 이탁오의 사상은 당시 중국과 같은 유교국가에서 부처와 노자보다 훨씬 파괴력을 지닌 이단이었다. 송나라 이후 주희의 주석으로 고정된 유교경전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학문체계였다. 공자를 비판하거나 경전의 진리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탁오가 공자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대의 한 사상가이자 교육자요 학자로서 공자를 존경했다. 하지만 그를 신성불가침의 우상으로 떠받들면서 중생의 눈과 귀를 다른 사상으로부터 막는 것은 가증스러운 짓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탁오로서는 목숨을 버릴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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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오는 ‘분서’ ‘장서(藏書)’ ‘설서(說書)’ 등 수많은 저작들을 통해 자신의 이같은 사상을 설파했다. 그는 책을 집필할 때 이미 예견했다. 책이 세상에 선보여질때 자신에게 미치게 될 화가 단지 지금처럼 비난 하는 강도에 끝마쳐질 것이 아니라는 걸. 그러했기에 책 이름도 불태워버려야 할 책(분서), 감추어야 할 책(장서)이라고 스스로 붙였다.
이탁오의 사상은 이 책에 소개된 ‘동심설’(童心說)에서 한층 물이 오른다. 그는 인간이 사회화되기 이전의 동심을 ‘진성진정’(眞性眞情)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도리와 견문, 그리고 사회로부터 무언의 암시가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면서 동심이 오염되고, 결국 소멸돼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서란 본래 동심을 지켜서 잃지 않게 하려는 것인데, 오히려 대의를 훔치고 성현을 사칭하는 도구로 전락했음을 꼬집는다.
특히 송대 이후 독서란 곧 주희를 통한 공자 읽기가 모두 였으며, 이는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하려는 과정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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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오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해서인지 책 말미에는 ‘생사초탈’이라든가 ‘인연’ 등 불교적 용어들도 간혹 등장한다.
이 책은 관료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오직 사상적 자유를 추구하며 겪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여정도 함께 묘사한다. 사상적 독립투사들의 삶이 대부분 외로웠듯이 그도 결코 예외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수백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엄연한 사상적·문화적 전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 이탁오는 누구
이탁오는 26세 때 관리 등용문인 ‘거인’에 합격해 하남·남경·북경 등지에서 하급관료 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 운남의 요안 지부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40세 되던 해 왕양명의 학문을 접하고 심학(心學)에 몰두했으며, 62세에 삭발하고 이단임을 자처하며 불교에 심취했다.
그는 유·불·도의 종지(終止)가 같다고 보았으며, 유가의 전제에 반대했다. 76세 되던 해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투옥돼 옥중에서 자살했다.
저서로는 ‘분서’ 6권,‘속분서’(續焚書) 5권, ‘장서’(藏書) 68권,‘속장서’ 27권’ ‘설서’(說書) 등이 있다. 그의 저서들은 명·청 시대의 가장 유명한 금서였지만, 대부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이탁오 평전>
옌리에산ㆍ주지엔구오 지음
홍승직 번역
돌베개 펴냄
2만2천원